페라리스의 신실재론과 디지털 시대의 휴머니티
상태바
페라리스의 신실재론과 디지털 시대의 휴머니티
  • 서민규 건양대·철학
  • 승인 2023.07.10 0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저자에게 듣는다_ 『마우리치오 페라리스』 (서민규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110쪽, 2023.05)

 

실재론(realism)을 표방하는 철학적 조류가 21세기에 들어서며 지적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그동안 철학의 세계에서 홀대받고 변방으로 밀려났던 ‘실재(reality)’가 드디어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는 현상(appearance)과 대립하여 구별되는 개념이다. 현상의 배후에 있지만 현상의 그늘에 가려 그 실상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중요한 그 무엇을 말하려 할 때 철학자들은 ‘실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실재론은 현상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의 근원을 다루며, 그 근원적 존재를 긍정하고 철학적 논의의 중심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21세기에 들어서 실재론이 부활하고 있는 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동안 추구해온 철학의 큰 흐름이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큰 흐름을 결정했던 것은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 믿음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선언했던 데카르트 이후 근대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간의 생각 즉, 이성의 힘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존재는 없는 것이며, 이성과 경험을 넘어서는 그 무엇에 대한 주장은 비합리적 신념이거나 과학의 영역 바깥에 있는 미신과도 같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인간은 이러한 방식으로 근대 이후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형성해 왔는데, 이제 그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리고 인간 합리성과 진리를 향한 모더니즘의 기획 자체를 거부하며 탄생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낳은 부수효과에 불과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은폐된 실재를 드러내기보다는 거부하거나 은폐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현상적 탐구로만 설명할 수 없는, 그리고 더 이상 은폐할 수 없는 실재의 참모습들이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넘어 더 깊이 있고 폭넓은 방식의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페라리스의 저서 Introduction to New Realism(2015)

영국의 철학자 로이 바스카(Roy Bhaskar, 1944~2014)는 근대적 세계관의 인간중심주의적 경향을 ‘인식적 오류(epistemic fallacy)’라는 개념으로 비판한다. 과학 철학에서 출발한 바스카는 인간의 경험과 그것의 현상화, 그리고 그 경험과 현상화의 대상이자 원인이 되는 실재 세계의 경계를 좀 더 엄격하고 확실히 구분하는 데 비판의 초점을 맞춘다. 근대의 철학자들은 그 경계를 불확실하게 설정했고,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인식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이 인식적 오류는 존재를 평면적으로만 해석하는 ‘일차원적 존재론(monovalent ontology)’을 양산했다. 그리고 경험적 세계에 국한된 일차원적 존재론과 인식론은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존재를 상정하게 해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바스카는 경험-실증적 인식론과 일차원적 존재론,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상정하는 초월적 관념론은 근대 이후 서양에 뿌리내린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고 본다.

프랑스의 철학자 캉탱 메이야수(Quentin Maillassoux, 1967~ )는 근대 이후의 서양 철학자들이 ‘사고(thought)’와 그 ‘대상(being)’의 상관관계(correlation)에 매몰된 나머지 대상 자체가 갖는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본다. 근대의 철학자들은 대상이 인간의 사고에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하느냐에 집중하면서 대상 자체의 존재 문제를 진리 탐구의 주변부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서양 철학을 지배해 왔던 언어분석철학, 현상학,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은 모두 사실상 반실재론의 철학이며, 오로지 언어, 담론, 텍스트, 의식, 권력, 이념 등이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게 했다. 따라서 메이야수는 ‘대상은 무엇인가?’의 존재론적 문제가 철학적 탐구의 주제에서 밀려나고 오로지 대상을 담아내는 인간의 사고 능력과 인식 구조에 천착한 서양의 모더니즘이 결국 대상의 존재까지 환원주의적, 정치 공학적으로 해석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 바통을 이어받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대상과 대상에 대한 진리를 불신하고 해체하려는 방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메이야수의 통찰이다.   
  
이 책은 또 한 명의 유력한 실재론자인 마우리치오 페라리스(1956~ )의 철학을 다룬다. 현재 이탈리아 토리노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며 존재론 연구센터 ‘LabOnt’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또 다른 관점과 시각에서 자신만의 실재론을 구축하고 있다. 페라리스는 직관적 측면에서 ‘상식(common sense)’과 ‘지각(perception)’의 중요성을 재발견함으로써 실재론으로의 귀환을 시도한다. 그는 우리 인간이 인식행위를 시도하기 이전에 애초부터 외부 세계와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 지각의 역할을 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히려 우리는 인식행위 이전에 대상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지점에서 실재의 본질을 획득할 수 있다.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1956∼ )

실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치밀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어떠한 인식 체계로도 그것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런데 근대의 철학자들은 실재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않은 채 인간 인식의 범주 체계로 실재를 규정해버리는 ‘현상학적 부주의(phenomenological carelessness)’를 범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페라리스는 오히려 실재의 세계가 능동적으로 인간의 인식방식을 결정한다고 본다. 가령 우리가 알고 있는 티라노사우루스는 인류 발생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고, 실재 세계에 그 존재의 흔적을 화석의 형태로 남겼기에 우리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실재는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 인간의 인식능력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인식의 범주 체계는 실재의 부수효과에 불과하다.

이 책 《마우리치오 페라리스》는 그가 제시하는 신실재론의 핵심 내용과 그가 지향하는 철학적 세계관을 하나하나 짚어 본다.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었지만 크게 세 부분으로 주제를 나누어 볼 수 있다. 1장부터 4장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한계와 그 근원적 문제에 대한 페라리스의 시각과 비판을 다룬다. 5장부터 7장은 페라리스가 제시하는 실재의 본성과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와 인식의 관계에 관한 견해를 살핀다. 8장부터 10장은 페라리스가 제시하는 사회실재론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그가 제시하는 제도적, 실천적 대안을 살펴본다. 특히 사회적 행위 분석의 개념으로 주창하는 ‘기록성(documentality)’의 실재성과 그에 근거한 ‘Doc-휴머니티’의 실천적 대안은 모든 것이 디지털 기록으로 남겨지는 21세기 인류 문명의 개선과 진보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살펴봐야 할 지점이다. 

페라리스의 이론에 관해 국내에 소개된 문헌은 2023년 현재 저자의 논문과 저서가 유일하다. 최근 국내에 소개되는 실재론자들 중 페라리스는 비교적 덜 알려진 학자다. 하지만 그가 보여 주는 철학적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는 절대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의 철학자로 대륙철학(continental philosophy)의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분석철학(analytical philosophy)이 제시하는 논점과 방법론에 적극 개입하며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21세기에 들어서 서양 철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 모색의 첫 단추는 유럽 대륙철학과 영미 분석철학의 경계선과 이분법을 해체하고 영원할 줄 알았던 철학의 오래된 범주, 존재론과 인식론의 경계와 이분법 역시 해체하여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것이다. 페라리스는 그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끼워 나가는 새로운 실재론자로 인류 지성사에 기록될 것이다.


서민규 건양대·철학

건양대학교 인문융합학부 교수다.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뉴욕주립대학교(버팔로)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Critical Realism and Spirituality(공저, 2012), Reality and Self-Realisation(2014) 등이 있으며, 최근 논문으로는 “반인간주의 실재론의 가능성: 로이 바스카 의 메타실재”(2020), “인간다움에 대한 반인간주의적 접근: 포스트휴먼 시대의 실재론”(2023) 등이 있다. 사회와 철학 연구회, 한국교양교육학회, 국제비판적실재론학회 회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