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과 갑질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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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과 갑질의 시대
  • 주재형 단국대·철학
  • 승인 2023.07.02 13: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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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21세기에 접어든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한창 전개되고 있는 이 젊은 세기는 이상하게도 종말을 향해 다가가는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에 물들어 있다. 인류의 생존 기반 자체를 무너뜨릴 기후 위기가 속수무책으로 턱 밑까지 다가와 있다. 우리 사회는 그에 더해서 전대미문의 인구 절벽 위기 속에서 조용한 절멸의 길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이 사회는 이미 오랜 기간 OECD 자살률 1위로도 모자라 출산율까지 급감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닫아버리는 중이다. 

그러니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 문화 산업의 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이라는 자조적 표현이 유행한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헬조선과 함께 2010년대 중후반 등장하여 이제는 일상어로 자리잡은 ‘갑질’ 또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낱말이다. 사실 이 두 낱말은 단지 일시적인 대중적 유행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총체적 구조를 이론화하고 진단하며 비판하는 온갖 거대 사회 이론이 설명력을 잃고 파산한 현재, 그러한 사회학적 분석을 직관적인 수준에서 대체하는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이 두 낱말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피부로 느끼고 파악한 한국 사회의 전체적 형상을 말해준다. 그것은 마치 병든 환자가 자신의 신체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고 울부짖는 외침과도 같다. 의사의 작업은 환자의 호소에 귀 기울일 때 시작된다. 인문학자의 일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자의 사유는 어딘가에서 이미 구성된 이론적 개념들이 아니라 사회가 지금 이 순간 외치는 고통의 호소에 대한 경청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헬조선과 갑질이란 말을 조금 더 뜯어보기로 하자. 헬조선은 우리 사회를 지옥과 같은 곳으로, 그리고 조선과 같은 곳으로 규정한다. 조선이란 국호가 상징하는 온갖 부정성이 헬조선이란 말에 배어있다. 내가 보기에 이 부정성들은 대략 두 가지 면모로 집약될 수 있다. 전근대 조선의 후진성, 그리고 실패한 근대화가 그것들이다. 억압적 신분제와 경직된 위계 문화, 부패한 관료제, 만연한 서민 착취와 빈부 격차 등이 전근대적 조선이라면, 근대 자본주의라는 세계적 흐름에 뒤처지면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구한말 조선은 20세기 한국 현대사에 절대 사라지지 않을 굴곡의 그림자를 깊이 드리웠다. 90년대 말의 IMF와 그 이후 점점 가속화되는 천민자본주의와 무한 경쟁 이데올로기는 실패한 근대화가 낳은 가장 최근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괴물일 것이다. 19세기 말의 조선이 안고 있던 국내적 병폐와 국제적 장벽들은 20세기 동안 무럭무럭 다양한 형상으로 자라나 헬조선으로 재탄생했다. 나는 이 헬조선이란 말에서 마치 운명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이 사회의 깊은 병증에 대한 한탄을 느낀다. 

그러면 갑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흥미로운 것은, 이 표현이 법적, 계약적 관계에 사용되는 용어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갑과 을은 그 자체로는 동등한 계약의 두 당사자를 지칭하는 대명사 성격의 일반 명사다. 갑질이란 말은 이 형식적인 평등의 법적, 계약적 관계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광범위한 폭력을 지시한다. 따라서 갑질은 근대 사회의 법치주의를 무력화시키는 폭력일 뿐 아니라, 바로 그러한 법치주의를 구성하는 폭력을 짚어내는 말이다. 갑질은 대기업과 하청 기업 사이, 발주처와 납품업체 사이, 가게 주인과 손님 사이,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 공무원과 민원인 사이 등등 온갖 경제적, 사회적 관계들 속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는 폭력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회과학의 위계적 폭력 관계들 모두를 가로지르고 포괄한다. 갑질은 계급적 폭력도, 성폭력도, 인종차별적 폭력도 아니다. 갑질은 “갑은 을에게 ~을 ~하도록 한다.”라는 건조한 계약서 문장의 외피를 두르고서, 일반적이고 형식적이며 중립적인 무언가처럼 등장하는 폭력이다. 우리 사회에서 갑질이란 표현은 이처럼 법을 비롯하여 근대 사회가 발명한 반폭력적 제도들로 대처할 수 없는 폭력, 오히려 그 제도들 한가운데에 명문화되어 있는 폭력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다.

누구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갑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 직장 상사의 갑질에 시달리던 부하 직원이 퇴근 후 들른 한 음식점에서 점주에게 횡포를 부리는 진상 고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무엇 하나 두려울 것 없어 보이는 대기업 재벌도 정부의 고위 관료에게는 꼼짝없이 을이 되어버릴 수 있다. 누구도 영원히 갑의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 갑은 고정된 사회 구조적 지위로 규정될 수 없다. 갑질은 우리 사회가 결코 단일한 구조로 설명될 수 없는, 무수한 지배 관계들의 열린 총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한국 사회는 단순히 자본주의적인 착취 사회도, 남성 지배적인 가부장 사회도, 인종 차별이 깊이 뿌리내린 사회도, 유교적인 위계 사회도 아니다. 이 모든 지배 관계들이 단일한 구조 속에서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교차하는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배 관계들을 안정되고 명확한 지배 ‘구조’로 고착화시키려는 시도들과 그에 대한 저항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회다. 

한국 사회는 분명 가능성들에 열려 있는 사회이고 아주 역동적인 사회이지만, 슬프게도 그 가능성들은 대다수가 새로운 지배 관계들의 가능성들이고, 그 역동성은 안정적인 지배 구조의 구축을 위한 역동성일 따름이다. 갑질하는 갑은 더 많은 경제적 이득과 물질적 안락을 취하려고 하고, 타인을 무자비하게 도구화함으로써 성적, 심리적 쾌락을 얻으려 하는 보편적 지배자의 이름이다. 갑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이 보편적 지배자를 예언하는 이름이며,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도래할지 모를 저 지배자를 아직은 그저 갑이라는 익명적이고 중립적인 명칭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헬조선이 우리 사회를 사라지지 않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규정한다면, 갑질은 우리 사회를 앞으로 도래할 끔찍한 총체적 지배자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반복되며 강화되는 폭력과 억압의 운명적 역사에 발목 잡히지 않으면서 사회의 모든 관계들 속에서 갑의 횡포가 구체화, 실체화되는 끔찍한 미래를 어떻게 회피할 것인가? 헬조선의 울부짖음과 갑질의 호소는 바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장밋빛 미래였던 21세기가 악몽 같은 현실로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관하고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는 자신의 살아 있음을 절감하는 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과 희망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주재형 단국대·철학

단국대 철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e)에서 앙리 베르그손의 생명 철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현대 프랑스 철학사 및 생명 형이상학, 철학적 우주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역서로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2008, 공역), 『현대 프랑스 철학』 (2014), 저서로 「철학, 혁명을 말하다」(2018, 공저), 「푸코와 철학자들」(2023, 공저) 등이 있고, 논문으로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의 존재 양태에 대하여」(2016), 「들뢰즈와 형이상학의 정초」(2017), 「러브크래프트와 철학: 반우주로서 생명」(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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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휘 2023-09-12 15:10:01
주재형 교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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