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같이 침몰하는 한국의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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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같이 침몰하는 한국의 대학
  • 임도빈 서울대·행정학
  • 승인 2023.07.0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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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직설]

요즘 대학에서 볼 수 있는 불편한 진실을 얘기해 보고자 한다. 일부 교수들이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관심 있게 보면 대학 강의실 현장은 완전히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함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은 교수는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 한다면, 학생은 강의에서 배우려는 자체를 포기한 듯하다. 아마 신입생 때는 그래도 강의에 기대를 했었는데 학기가 지날수록 실망해서인지도 모른다. 대학의 강의란 고등학교 때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인터넷 강의나 엄청 재미난 유튜브에 비해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PPT도 엉성하게 만들고,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재미도 감동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웬만한 지식은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니 굳이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일도 없다. 

두 번째 특징은 교수는 학생들의 수업 참여를 원하고 적극적 반응도 원하지만, 학생들은 가급적 수업 참여를 피하려 한다. 수강 신청할 때부터 조별 과제 시키는 과목은 피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 외동이로 큰 요즘 학생들에게 서로 협력하는 능력을 기르고자 시도되는 조별 과제가 팀플이 아니고 팀킬(team kill )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교수들은 요즘 학생들이 힘들다고 하니 이름도 기억하고 친절을 베풀기 위해 다가가고 싶어 하지만, 학생들은 정반대로 ‘제발 나를 가만히 놔둬주세요’라는 자세가 지배적이다.  다시 얘기해서 학생들은 투명인간으로 남고 싶어 한다. 심지어 출석 부르는 것을 통해서 다른 학생들이 자기 이름을 아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 하는 학생들도 있다. 수업 시간에 ‘아무개’ 자기 이름을 말하며 칭찬해줘도 기분이 좋아지기보다는 더 부담이 되어 싫어한다. 어떤 경우에는 수업 시간이 끝난 후 개인적으로 다가와 제발 자기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수 없느냐고 부탁한다고도 한다. 

소위 명문대학이 이럴진대 다른 대학은 더 심각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방대학에서 강의하는 많은 교수들은 학생에게 발표를 시키거나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한다. 학생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세미나식으로 수업이 이뤄지는 대학원에서도 이런 현상들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교수와 학생 간 동상이몽에 따라 수업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쉽게 한 학기를 보낼 수 있는가라는 노하우도 발달한다. 교수가 얘기할 때마다 고개를 끄떡끄떡하여 ‘맞습니다’라는 식의 반응을 하는 것이 괜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보다는 교수님에게 질문을 당하지 않는 방법이다. 지적을 당해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공부 안 했거나 모른다는 것이 노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피하는 방편인 것이다.

여기서 수업 참여도 싫고, 교수가 이름을 기억해주는 것조차 싫은 심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학생이라는 집단의식보다는 개인주의적 사고 때문에, ‘왜 나만 못할까’,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주목받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차라리 강의 시간 끝나고 개별적으로 와서 물어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경쟁이 불러온 결과이다. 모두 남을 의식하는 것이고, 자신의 의사를 드러낼 줄 모르는 것이다. 남의 눈치만 보고, 남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세대이다.

 
‘배움의 장’인가, 학점 따기 도구인가?

이 모든 현상은 가르침과 배움의 현장으로서 대학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강의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고, 존경과 배우고 싶어 하는 롤모델로서의 교수 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대학 교육활동의 핵심이 ‘강의’라고 한다면, 요즘 생태계에서는 강의의 본질적 기능이 한계를 노정하고 다른 형식적 기능으로 대체되고 있다. 

고등학교 때에는 주어진 식사를 강제로 먹었다면, 대학에 와서는 차려놓은 밥상 중 맘에 드는 것을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소위 좋은 강의, 즉 배움을 주는 유익한 강의를 앞다퉈 들으려고 경쟁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즉 좋은 강의보다는 소위 꿀강이라고 하여 재밌고 쉽고 학점 따기 쉬운 강의에 학생들이 몰린다. 매학기 수강 신청할 때마다, 학생들이 꿀강을 듣기 위해 광클릭을 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특히 학점을 잘 준다는 강의를 듣고자 경쟁한다. 수강신청에 성공한 학생과 하지 못한 학생 간에 거래도 이뤄진다.

결석, 지각 등에 몇 점 감점, 레포트 제출에 몇 점, 기타 활동에 몇 점 주기로 되어 있고, 그것을 다 채울 시 합산하면 몇 점 등 학점 산출과정이 투명해야 공정하다고 본다. 그리고 몇 점 이상이 돼야 A라든지 이런 것이 명확하게 계산되는 것이 중요하다. 예측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이 조건을 채운다. 

어학강의도 이미 그 언어를 잘하는 학생이 수준을 낮춰서 수강을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순진하게 외국어를 새로 배우려고 어떤 언어의 초급강의를 신청한 학생들이 초보자가 아니어서 출발점이 다른 학생들로 인해 기가 죽고 학점을 망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어느 강의가 어떻고 학점이 어떻고 하는 정보는 학생들만의 가상공간에서 생생한 정보가 축적되고 유통되고 있다. 

이렇게 좋은 학점에 집착하다 보니 당연히 학생-교수 관계는 강의 내용보다는 평가 방식에 더 집중된다, 인문사회계의 경우, 학생들의 사고를 측정하는 논술형 시험과 보고서가 중요한 측정 도구였다. 그런데 학생들은 채점에서 교수의 주관성이 - 아니 학생들 입장에서는 자의성이 더 적합한 용어일 것이다 - 작용하여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주관식 시험보다는 객관식 시험을 선호한다. 내 강의를 듣는 대학 2, 3학년 학생이 에세이 식 주관식 시험은 처음이라는 학생도 있다. 

개강 초에 객관식 시험도 교과서나 강의에서 배운 범위 내에서 나오는지도 몇 번씩 확인하고 마음에 안 들면 수강변경을 한다. 배운 내용 밖에서 출제되면 그만큼 불확실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대부분 학생들은 싫어한다. 학문의 장으로서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기르고, 시험에서 이를 측정한다는 것은 옛날 얘기가 되었다. 강의의 내용보다 학점의 ‘공정성’이 가장 중요한 수강 기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학생들이 생각하는 공정성이란 자신이 좋은 학점을 딸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소위 창의력을 기른다든지, 지식을 배운다든지, 인성을 기른다든지는 먼 나라의 얘기이고, 대학 강의는 학점 따기 도구가 되어가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슬픈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교육인가, 취업학원인가?

‘교수들이 10년 전 쓰던 낡은 강의록으로 수업을 하니 학생들이 멀어져가는 것 아니냐’라는 비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수들은 밤새워 강의 준비를 하고, 심지어 강의 전 식사도 거르면서 마지막 강의 준비를 하는 등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왜 학점 따기 도구로 전락하는 것과 같이 강의의 공급자와 수요자 간 천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학생들이 강의가 교양이나 지식 습득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진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극심한 경쟁으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졸업 후 취업이 절벽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취업난이 심할수록 대학 강의는 겉돌이가 된다. 이과생보다는 문과생에게, 문과생 중에도 상경계보다는 인문사회계에 이런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 취업과 연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우선 학점이라도 좋게 받아 놓아야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 꽤나 했다는 소위 SKY 대학생들이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는 것 같다. 특히 이들은 그나마 법전원 진학이 인생 성공에 가장 가까이 가는 대안이라고 믿기 때문에, 각 과목에서 A+ 받는 것에 사활을 건다. B 학점을 받느니 차라리 재수강을 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대학이 취업학원(법전원 입학도 넓은 의미의 1단계 취업이라고 봐야 한다)으로 자리매김되면서, 교수도 운전학원 강사와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 가고 겉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든 대학생들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실력은 올라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강의에서 배우지 않더라도 소위 교과 외 과정 등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 배운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예컨대, 서울대 학생은 이미 모든 지식을 대입준비 과정에서 배우고 암기했기 때문에 과연 대학 와서 무엇을 배워 갈까 의문이 든다. 더 심화된 능력이 배양되거나 새로운 지식이 많아야 한다. 

2, 3학년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사회탐구에서 배운 기본 지식을 물어보니 놀랍게도 기억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암기식 고등학교 교육의 한계를 드러내는 단면이다. 일단 암기하여 시험을 치르고, 끝나면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입학 후 일어난 4년 동안 대학교육의 진정한 효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이상의 서술이 모든 학생 혹은 대학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기회 있을 때마다 교수들에게 말하면 동의하는 분위기이고, 자신들의 유사한 경험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현상이다. 물론 자기 강의의 유용성에 대해 확신에 찬 교수들도 많이 있지만 말이다. 일부 동기 부여된 학생이 있겠지만 동기 면에서 중간 이하의 학생들, 특히 인문사회계 학생들에게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대학의 교육현장에서 관찰되는 이 현상은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만약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대학졸업자가 직장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게 한다면 이 현상이 사라질 것인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현 자동화,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과 직업구조 변화를 본다면 이런 해결책이 쉽게 오리라는 예측도 그리 쉽지 않다. 거꾸로 20%가 일하고, 80%가 노는 20:80의 사회가 올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

대학 위기의 본질은 재정난이 아니고, 대학의 ‘존재 이유’에 있다. 수능을 어떻게 고쳐서 소위 입시 과열을 해소하느냐가 국가가 해결해야 할 난제의 핵심이 아니고, 대학 교육의 자리매김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우리의 대학은 타이타닉호같이 침몰하여 영구히 구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절박한 마음이다.


임도빈 서울대·행정학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학사 및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로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정치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행정학회 회장, 서울대 행정대학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정부 경쟁력 이론 정립과 사람중심의 더 좋은 한국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연구했으며 인적자원관리라는 측면의 공공부분 역할과 대학교육의 중요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정책학회, 한국행정학회 그리고 서울대학교에서 학술상을 수여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국가와 좋은 행정>, The Two Sides of Korean Administrative Culture(2019)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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