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위기에 대처하는 사회과학, 그 또 하나의 행로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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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위기에 대처하는 사회과학, 그 또 하나의 행로를 꿈꾸며
  • 곽송연 서강대·정치학
  • 승인 2023.06.2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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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오월의 정치사회학: 그날의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시선』 (곽송연 지음, 오월의봄, 216쪽, 2023.05)

 

최근 수년간 사회과학계의 흐름을 주도한 주요 의제는 아마도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닐까 싶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시간 이어진 이 같은 조류는 초창기 정치의 사법화 현상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해 제3의 물결을 경험한 일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퇴행과 정체, 동유럽에서 권위주의 계승 정당의 약진 등에 힘입어 더욱 거세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직접 예시한 결정적 도화선은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을 듯하다. 돌이켜보면 근 2백여 년에 이르는 미국 공화당의 역사성과 시스템의 안정성을 뒤엎고 등장한 신생 후보 트럼프의 주 무기는 차별과 배제의 언어, 그리고 이에 덧댄 기성 정치에 대한 출구 없는 공격이었다. 이후 그의 당선과 함께 시작된 민주주의 체제와 가치에 대한 부정은 뭇사람들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는 흔히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라 일컫는 언론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자유에 제약을 가하고, 공공연하게 소수자,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부추겼다. 급기야 미국 민주주의는 의회 의사당에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난입해 폭력에 노출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맞이했다. 

시위대에 점령당한 美의회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6일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뒤 주요 인사 장례식 등 의회의 중요 행사가 주로 열리는 로툰다 홀을 점거하고 있다. <사진: EPA 연합뉴스> <문화일보> 2021.1.7 https://v.daum.net/v/20210107113059495

학살은 무너진 민주주의 시스템이 예비한 최종 종착역

『오월의 정치사회학』이 관심을 기울인 학살 친화적 사회의 대표적인 징후가 바로 이 같은 차별과 배제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지도자와 엘리트의 등장이다. 20세기 중엽을 전대미문의 전쟁과 학살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던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살은 이 같은 거리낌 없는 ‘구별 짓기’와 혐오를 권장하는 사회가 도달하는 최후의 종착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틀러의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인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 이전 게토가 존재했고, 그에 앞서 한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선동과 구호가 제도적 차별로 연결되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오월의 정치사회학』이 주목한 학살, 혹은 근대사회서 행해진 최악의 폭력 연구는 민주주의의 생존 양식에 대한 성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달리 말해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진단하고 그 해법을 구해야 할 의무를 지닌 사회과학의 행로에서 학살의 원인과 조건을 밝히는 것은 여전히 미개척된 경로의 재발견을 뜻한다. 

우리의 경우 그 비교적 가까운 역사적 사례가 5·18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집필된 『오월의 정치사회학』은 제노사이드, 그중에서도 정치적학살(politicide)의 결정적 사례로서 학살이 발생하는 보편적 조건들을 탐색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마지막 장에 해당한다. 이와 함께 앞 세 개의 장은 학살 연구에서 핵심적인 논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총 3가지 의문에 순차적으로 답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그 각각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학살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왜 시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가? 둘째, 대중들이 잔학행위를 방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학살의 과정과 그 직후 가해자와 국가는 어떻게 사실을 부인하는가? 등이다. 따라서 4장을 먼저 읽고 나머지 장을 이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처럼 다소 익숙지 않은 독해 방식을 권유하는 이유는 이 책이 5·18이라는 특정 역사적 사건을 달리 해석하는 새로운 시도라는 측면에 머무르기보다 학살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까지 독자들의 시선을 통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희망 탓이다. 이것이 이 책의 저자로서 권하는 첫 번째 독해 방식이다. 두 번째 방식은 각 장에 배치된 마지막 절들을 중심으로 모아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각 장의 마지막 절들이 각각의 세부 주제에 대한 현재 논의와 전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4장의 마지막 절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처하는 하나의 척도로서 국제사회의 노력과 우리 사회의 나아갈 길에 대한 제언을 담고 있다. 


5.18로부터 추출한 학살 친화적 사회의 경고에 민감해야

다시 서두로 돌아가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와 그 성원들이 목격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의회 의사당의 점거사태는 모두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불과 얼마 전까지 사회주의 체제와 이념에 대항하는 서방 세계의 우월한 가치와 제도를 패권적으로 설파했던 미국 민주주의의 심장부가 아니었던가? 흡사 그 장면은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를 풍미했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화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살풍경한 도전과도 같았다.

위기는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는 또한 ‘게임의 규칙’을 무너뜨리는 일탈 행위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저발전된 국가만의 전유물이라는 강고한 믿음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이 이끈 무엇보다 강렬한 깨달음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합법적 경로를 통해 등장한 지도자에 의해 스스로 침식되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취약성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바꿔 말해 우리는 민주주의가 지난 시절 횡행했던 쿠데타나 계엄령, 군을 동원한 물리력에 의해서만 파괴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 위험에 대한 감지는 언제, 어디서든 유효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트럼프와 같은 배제적 신념을 지닌 최고지도자와 엘리트의 출현은 예측 가능한 위협적인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 정가에서 시쳇말로 떠돌았던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금언을 떠올려 본다. 그렇다. 시스템은 영원하지 않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민주주의의 세계에서 멈춤은 곧 퇴행이며, 더 깊고 더 넓은 정동만이 시스템을 보존하는 동력이다. 민주주의야말로 생물인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5.18로부터 학살 친화적 사회체계의 보편적 원리들을 추출했다. 그러니 이 책이 어느덧 민주주의의 본질을 사유하는 풍토가 주변으로 밀려나는 사회과학계의 흐름에 작은 물수제비나마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감히 기대해본다. 


곽송연 서강대·정치학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책임연구원. 제노사이드와 민주주의 정치문화를 연구하는 정치학자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5·18 광주와 국가의 지역주의 담론 연구>를 제출했으며, 이후 국가 담론과 5·18 가해자,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자신과 사회에 필요한 선한 영향력을 갖추기 위해 하루하루 연습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폭력과 무지의 해악’을 경계하는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 주요 논문으로 2021년 한국정치학회 ‘Research Grant’ 수상 결과물인 <민주화 이후 5·18에 대한 부인(denial)의 정치학> 등 11편을 발표했고, 《동북아 냉전체제의 고착과 문화적 재현》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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