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구조주의의 견지에서 ‘사회과학’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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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구조주의의 견지에서 ‘사회과학’ 하기
  • 배세진 박사·정치철학 
  • 승인 2023.06.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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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늦은 해제_ 『가부장 자본주의: 여성과 남성은 왜 각각 불행한가』 (폴린 그로장 지음, 배세진 옮김, 민음사, 276쪽, 2023.06)

 

독자들은 현대 프랑스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미셸 푸코 등의 사상가들이 구성하는 사유 흐름으로서 포스트-구조주의를 연구하는 정치철학자가 왜 뜬금없이 경제학 저서를 번역했는지 의아할 수 있다. 이 점을 해명하는 방식으로 《가부장 자본주의》라는 탁월한 ‘사회과학 책’(경제학의 자폐적 경계 내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저서라는 점에서)이자 ‘철학 책’(사회과학의 관점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바를 풀어가기 위해 암묵적인 방식으로 포스트-구조주의의 관점을 채택해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인식한다는 점에서)을 맥락화하고 해설해보자. 

경제학이라는 분과학문 내에서만 아카데믹한 방식으로 작업했기에 지금까지 한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그 다음에는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호주 학계에 정착한 폴린 그로장은 오랜 기간 ‘페미니즘 경제학’을 연구해온 아카데미 내 주류경제학자이다. 그녀는 대중적이지는 않았던 지금까지의 자신의 작업을 이 대중적(이면서도 전문성을 전혀 상실하지 않고 있는) 저서 《가부장 자본주의》에 집약해 놓았는데, 그녀의 작업을, 그러니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는 이 저서가 진보적 ‘주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와 쥘리아 카제 부부가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기획하고 지도하는 ‘경제-역사’(Éco-Histoires) 총서를 출범시키는 그 첫 번째 책이라는 점이다. 

《21세기 자본》(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옮김, 이강국 감수, 글항아리, 2014)과 《자본과 이데올로기》(토마 피케티 지음,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로 국내에 잘 알려진 토마 피케티, 피케티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미디어 구하기》(줄리아 카제 지음, 이영지 옮김, 글항아리, 2017)로 국내에 소개된 쥘리아 카제, 국내에 번역된 이 두 경제학자의 저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듯, 피케티와 카제의 이 총서는 경제학을 주류경제학의 참호 바깥으로 끄집어내 다시 사회과학 내로 통합하려는 대담한 그리고 지극히 ‘비주류’적인 지적 기획의 실현물이다. 

인문사회과학 내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실증주의적인 분과학문으로서 주류경제학은, 자연과학을 모방하는 고도로 전문화된 실증주의적 관점(결국 이론)과 방법론 즉 정향을 통해, 인문사회과학 내 다른 분과학문들과의 대학 내 경쟁에서 현재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주류경제학이 자신의 주장대로 사회과학 내 다른 분과학문들보다, 또는 경제학 내 이단적 흐름들의 모임으로서 비주류경제학보다 정말 더욱 ‘과학적’인지, 그리고 그러한 과학성이 앞서 언급한 자연과학을 모방하는 고도로 전문화된 실증주의적 관점(이론)과 방법론 즉 정향으로 인해 보증되는 것인지 옮긴이로서는 판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의적이고 확정적인 답변을 산출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러한 논쟁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옮긴이는 인문사회과학 내 연구자로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테제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실증주의적 정향의 주류경제학만이 경제학의 전부일 수는 없다는 것, 경제학이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대상으로 취하는 지식으로서의 인문사회과학 일반으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다는 것, 실증주의적인 정향을 취함으로써 해석학적인 정향을 취하는 다른 분과학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보지 못하게 되는 것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테제로부터, 실증주의적 정향을 통해 20세기 전체에 걸쳐 (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과학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려는 역사가 분과학문으로서 자신의 역사였던 주류경제학을 (특히 비주류경제학의 도움을 통해) 다시 사회과학으로 통합하는 것이 그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21세기 경제학의 지적 기획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옮긴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전혀 아니다. 하지만 피케티든 카제든 이 책의 저자든 주류경제학 내에서 훈련받은 전문적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분과학문 내에서 ‘파문’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주류경제학의 바깥과 ‘이단적으로’ 교통하려 시도한다는 점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가부장 자본주의》를 입체적으로 독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맥락, 그러니까 주류경제학의 폐쇄성을 지양하고 그 바깥의 사회과학과 교통하고자 하는 이러한 저자의 정향을 인지해야 한다. 저자는 주류경제학과 그것이 취하는 실증주의적 관점의 한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한계가 가부장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주류경제학이 노정하는 무능 또는 무관심으로 표현된다는 점을 역시 암묵적으로 주장하면서, 주류경제학 바깥의 여러 사회과학들, 실증주의적 관점만을 배타적으로 취하지 않는 여러 사회과학들을 자유롭게 활용해 가부장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역시 암묵적으로지만, 저자는 이러한 ‘행보’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실증주의의 관점에 머무른다면, 가부장 자본주의와 같은 지극히 갈등적인 정치적 대상은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 전체의 행보, 그러니까 문제를 인식해 학술적으로 풀어나가는 스타일은 그 어떠한 의미에서도 실증주의적이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이러한 분석에 의거해 이 가부장 자본주의에 대한 지극히 정치적인 ‘비판’으로까지 나아간다는 것인데, ‘들어가며’와 ‘나가며’는 일반적인 경제학 저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자기-기술지적’이고 ‘주관적’인 글로서 그것이 목표하는 바는 가부장 자본주의에 대한 학술적 비판을 수단으로 하는 페미니즘 정치의 담론적 실천이다. 저자는, 역시 암묵적인 방식으로, 경제학이 인간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분석으로 스스로를 제한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분석에 기반해 이 인간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비판과 이를 통한 변혁 즉 정치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니, 옮긴이의 눈에는, 정말 ‘과학적인’(즉 사회과학적인) 분석이라면 이는 ‘규범화된’ 현실에 대한 인식의 견지에서의 비판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고까지 저자가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저자가 이렇게 정식화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우리는 이를 분석에서 비판으로, 비판에서 실천으로, 실천에서 (개인과 사회의) 해방으로 나아가는, ‘유럽 대륙철학’에 전형적인 도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3부 ‘문화적 요인의 기원과 진화’에 집약되어 있는 저자의 정치철학(이를 관점이라고 부르든 이론이라고 부르든 정향이라고 부르든 아무 상관없는데, 그러나 옮긴이는 아래에서 서술할 이유로 이를 저자의 ‘정치철학’이라 부르고자 한다)의 핵심 테제에 이르게 된다. 

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그 자체 비판적, 정치적일 수밖에 없을까? 과학적인 분석이라면 규범과 비규범 또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일견 자명해 보이는 이분법, 특히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분석되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의 허구성을 폭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화와 규범(젠더 문제에 천착하는 저자가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표현으로는, ‘문화적 규범과 젠더 정체성’)에 의해 구성된 ‘주체’로서의 우리가 정상적인 것이라고, 다르게 말해 ‘자연적인’ 또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인식하는 바는 정말로 자연적인 것이 전혀 아니라 문화와 규범(더 나아가 미셸 푸코 식으로 말해 ‘권력’)이 회고적인 방식으로 그것의 기원을 자연에 허구적으로 투사해 가공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철학에서 비판하듯 이를 본질주의의 오류라 부를 수 있는데, 이러한 오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저자가 ‘잘근잘근’ 비판하는 많은 경제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 또한 이 함정에 부지불식간에 빠져버리고 만다. 본질주의의 함정에 빠진 연구자들에 의해 ‘과학적’으로 보증되기까지 하는 문화와 규범은 그 악순환 속에서 자기 충족적 예언을 통해 자기 발전하면서 스스로를 점점 더 제2의 자연 또는 필연으로 확립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개입하면서 저자는 자연과 문화 간 관계의 문제에 천착하고 이 문제를 그 외연이 최대한 넓은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이 저서 전체를 통해 풀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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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uline Grosjean

예를 들어, 저자는 여성과 남성 간 불평등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성과 남성 간의 신체적 차이(결국 자연적 차이)가 아니라 이러한 신체적 차이를 그 원인으로 회고적인 방식으로 허구적으로 구성하는 젠더 문화와 규범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젠더 문화와 규범이 여성과 남성 모두의 인식에 영향을 미쳐 지금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많은 자연화된 결과들을 생산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나는 여성’ 또는 ‘나는 남성’이라는 젠더 정체성을, 우리 삶에서 정말 가장 자명한 것으로 인정되는 바를 형성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젠더 문화와 규범이, 저자가 특권화하는 예시에 주목하자면, 영국의 죄수들(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된)의 호주로의 추방과 양차 대전(많은 젊은 남성들의 죽음을 초래한)과 같은 성비 불균형을 초래하는 역사적 사건들에서부터 형성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젠더 문화와 규범이 인식의 차원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것이기에 역으로 미투 운동 등과 같은 새로운 정보에 의한 인식의 조정을 통해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개념화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서서 자연과 문화 간 관계의 문제에 천착한 또 다른 사유 흐름인 포스트-구조주의와 만나게 된다. 현대 프랑스철학의 견지에서도 이 저서가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적인 테제를 사회과학적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인데, 자연과 문화 간 이분법을 해체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 테제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이러저러한 생물학적 존재이며 그에 대한 지식을 자연과학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지만(포스트-구조주의는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구성주의가 전혀 아니다) ‘주체’로서의 우리는 결코 이 ‘생물학적인 것’을 ‘주체적인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여성 차별은 주체적 차원의 것, 조금 더 쉽게 말해 사회적 차원의 것이며, 이 여성 차별의 기원을 여성과 남성 간 생물학적 차이(임신과 출산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는 차이라든지, 평균적인 신체 능력에서의 차이라든지)에 두는 것은 위에서 지적했던 본질주의, 즉 회고적인 방식으로 행해지는 생물학적인 것에 대한 주체적인 것으로의 허구적 구성에 불과하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자연과 문화 간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써, 문화가 본질주의라는 수단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주체에게 행사하는 ‘규범권력’(피에르 마슈레)을 비판하고 주체를 그 허구적인 생물학적 기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지적 기획, 이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지배 상태를 재생산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것도 지극히 정치적인 기획이다. 

바로 이러한 지적이고 정치적인 기획을 (포스트-구조주의와 공명하는) 자신의 비판사회학 내에서 사회과학적 방식으로 실현한 것이 피에르 부르디외의 공적인데, 저자 또한 명시적으로 의거하는 부르디외의 ‘하비투스’ 개념은 이러한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적인 것을, 포스트-구조주의적으로 말해 주체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이 글에서는 부정확하더라도 이러한 표현에 만족하도록 하자) 사유를 집약하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저서는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여성과 남성 간 젠더 이분법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젠더 문화와 규범을 비판하고 젠더 정체성을 다르게 사유하고자 노력한 주디스 버틀러의 사유와 일맥상통한다. 저자가 WEIRD, 즉 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Democratic한(서구의, 교육수준이 높은, 산업화된, 부유한, 민주주의가 확립된) 세계에 속하는 일부 특수한 여성들만을 강조하는 또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강조하는 관점을 비판하고 교차성 페미니즘적 정향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일관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최신 고인류학에서 부르디외적 비판사회학까지 사회과학을 종횡무진 누비면서도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논의로까지 진입하지는 못하기에 자신의 탐구 대상을 (자신이 철학적으로 정의까지 하지는 못하는) 문화와 규범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논의에 의거하면서 한걸음 더 철학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저자가 정의하지 않으면서 활용하는 문화와 규범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포스트-구조주의가 주체적인 것의 견지에서 자연과 문화 간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넘어섬을 통해 현실에 정치적으로 개입하고자 적극적으로 활용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사회과학의 역사는 ‘사회학적 상상력’(C. 라이트 밀즈)을 동원해 이러한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사회구성주의’라는 부당한 비난을 들을 정도로까지 철두철미) 비판해온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 그리고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의 지식에 기반해 자신의 학문적 논의를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하면서(특히 동시대에는 뇌과학이 생산한 지식들이 여기에서 큰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회학적인 반본질주의적 관점의 헤게모니는 점점 쇠퇴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 지적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지식을 사회과학 담론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무용하고 그릇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 전혀 아니라, 그러한 간학문적 활용이 극도로 신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한 활용 속에서 사회과학적 견지에서 망실되는 지점은 무엇인지 항상 강박적으로 의식해야 한다는 점을 사회과학자들이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장 공격적으로 실증주의적 학문인 주류경제학 내에서 훈련 받은 저자가 다른 사회과학자들보다도 더 철저하게 이러한 지점들을 고민하면서 인간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여성과 남성 간 젠더 이분법에 기반한 그 문화와 규범을 비판하고 여성과 남성 모두의 해방을 위한 정치적 실천을 촉구한다. 비록 전문적인 철학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문화와 규범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개념 규정에 기반해 심도 깊은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는 학문적 정직성이 허락하는 한계 내에서 성실하게 주류경제학 바깥의 사회과학적 논의들을 따라가면서 가부장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젠더 문화와 규범을 설득력 있게 해체한다. 

사회적인 것에서 자연적인 것으로의 본질주의적 전회, 그리고 이와 동궤의 극단적 실증주의화 속에서, 사회과학은 사회에 대한 지식의 폭발적 성장과 사회과학적 사유 그 자체의 망실이라는 기이하고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방법론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방식이든, (그 자체 ‘과학적’임이 자명해 보이는) 자연과학의 성과에 더욱 집착적으로 의거하는 방식이든, 사회과학이 자신의 위기로부터 탈출하고자 취하는 길들 그 자체에 대해 이제는(그러니까 대학의 위기, 더 나아가 사회의 그 어느 때보다도 심원한 위기를 기화로) 한 번쯤 질문해볼 때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을 가장 공격적으로 실증주의적인 주류경제학 내에서, 그것도 가장 자명해 보이는 인간적 본질인 여성과 남성이라는 섹스를 대상으로, ‘비과학적’이고 ‘이단적’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저자는 급박한 현 정세에 정치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이 저서를 용기 있게 집필했다. 

대학의 위기 속에서 인문사회과학 내 해석학적 전통이 대학에서 소멸하고 실증주의적 사유만이 유일하게 과학적인 것으로 일반화되면서, 과학과 정치의 가치중립적 분리가 과학적 연구의 전제조건으로 확립되고 있다. 이로써 정말 우리가 과학적 지식의 축적을 위한 왕도에 들어서게 된 것인지 아니면 과학적 지식의 범위를 환원주의적으로 좁히는 방식으로 정치의 차원을 인문사회과학 내에서 제거함으로써 (가치중립적이라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그러한…)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된 지식만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게 된 것인지, 그래서 인문사회과학의 정치적 의무, 지성의 진전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는 의무를 방기하게 된 것은 아닌지 아직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다. 경제학의, 더 나아가 사회과학의 정치적 의무에 대해 인문사회과학자들이 한 번 더 고민하도록 ‘올바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참고자료】

■ 〈쥘리아 카제(Julia Cagé)와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경제-역사(Éco-Histoires) 총서 소개 글〉의 한국어 번역

역사의 흐름은 사전에 씌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다. ‘경제-역사’ 총서에서 선보일 책들의 야심은 역사가 자신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들고 이 역사가 더 나은 지평으로 자신의 방향을 바꾸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세계적 명성을 가진 경제학자들이자 공적 논의를 선도하는 주요 지식인인 쥘리아 카제와 토마 피케티가 ‘경제-역사’라는 새로운 총서를 제안한다. 

경제-역사는 경제를 쓰는 또 다른 방식, 경제를 사회과학의 중심에 그리고 공동체적 삶과 공적 논의의 중심에 재위치시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

경제-역사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확신에 기반한다. 우리의 동시대 민주주의의 혼란은 다른 사회과학들에 비해 그리고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 비해 경제학적 지식이 과도하게 자율화되었다는 점으로부터 유래한다. 하지만 경제적, 역사적, 사회학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접근 간의 교차만이 사회-경제적 현상들에 대한 우리 이해에서의 진보를 가능케 할 수 있다. 

경제-역사는 젊은 여성 연구자와 남성 연구자를 무대에 등장시키고, 이들을 통해 도래하고 있는 세계의 거대한 주제들을 취급한다. 계급과 젠더 그리고 인종에서의 불평등, 지식에 대한 접근에서의 그리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온전하고 전체적인 참여에 대한 접근에서의 어려움, 민주주의에서의 불평등과 공적 논의에 대한 재성찰,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지속 가능성과 경제 시스템에 대한 재정의 그리고 상업과 금융에서의 세계화에 대한 재정의 같은 주제들 말이다. 이 총서는 비교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을 특권화할 것이며, 강력한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권장할 것이다. 사실확인을 넘어 현실에 참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오늘날 시급하다. 

경제-역사는 1년에 한 권 혹은 두 권의 단행본을 정기적으로 출간할 것이다. 

쥘리아 카제: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 하버드 대학 경제학 박사. 현재 파리 정치과학 대학(시앙스포, 그랑제콜) 경제학과 교수. 《Sauver les médias》(Seuil/La République des idées, 2015)(《미디어 구하기》), 르몽드와 프랑스 퀼튀르의 페트라르크 에세이 상을 받은 《Le Prix de la démocratie》(Fayard, 2018), 《Libres et égaux en voix》(Fayard, 2020), 그리고 브누아 위에(Benoît Huet)와 함께 《L’information est un bien public. Refonder la propriété des médias》(Seuil, 2020)를 썼다. 

토마 피케티: 사회과학 고등연구원(EHESS) 연구 책임자이자 세계 불평등 연구소(Laboratoire sur les Inégalités mondiales)의 공동 지도자. 《Le Capital au XXIe siècle》(Seuil, 2013)(《21세기 자본》)와 《Capital et idéologie》(Seuil, 2019)(《자본과 이데올로기》)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저자. 피케티의 작업들은 부의 분배가 취하는 역사적 동역학에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세무적 제도들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명증화했다.  


배세진 박사·정치철학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 파리-시테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같은 대학 대학원(정치철학 전공)에서 「푸코-마르크스주의와 화폐: 노동-가치, 물신숭배, 권력관계 그리고 주체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비데 등의 현대 프랑스 철학을 문화연구의 틀에서 연구·번역하고 있다. 역서로 『미셸 푸코』, 『마르크스의 철학』, 『역사유물론 연구』, 『무엇을 할 것인가?』, 『검은 소』, 『마르크스주의 100단어』,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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