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전환과 새로운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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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전환과 새로운 지성
  • 신승환 가톨릭대학교·철학
  • 승인 2023.06.2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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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지금 우리 시대가 문명의 전환기에 처해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주된 체제였던 농경사회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후기 산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또 다시 거대한 시대적 전환을 앞두고 있다. 흔히 정보화 시대와 생명공학 시대로 불리는 이 시간은 후기 산업사회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의 징후를 매우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전환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다가올 시대가 어떠한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우리가 이 시대를 규정하거나 이해할 명확한 사유의 틀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현 시대를 특징짓는 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자유주의 체제는 현대인에게 커다란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지식 체계를 결정 지었던 과학ㆍ기술은 현대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체제의 위력을 절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점차 이 체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인식과 정반대의 관점에서도 과학ㆍ기술 문명의 발전은 그 자체로 문명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과 그로 인한 정보화 시대와 함께 인공지능, ChatGPT, 나노혁명, 로봇공학 시대를 수용하기에 후기 산업사회 체계는 더 이상 타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이런 시대를 해명할 사유체계가 부재하다는 사실도 명확하지 않은가. 정보공학과 생명공학의 결합은 이른바 포스트휴먼(post-human)을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시대와 다가올 새로운 인간유형을 해명할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욱이 한계에 이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이 사회가 지속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1972년 노벨 의학 및 생리학상을 수상한 신경생리학자 에델만(J.M. Edelman)은 인간의식에 대한 연구를 통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전통 철학의 여러 이론을 거론하면서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고리양자중력 이론을 통해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이해 지평을 제시한 스몰린(Lee Smolin) 역시 현대의 물리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적 관념을 요청한다. 그 외에도 최고의 자연과학자들 가운데 새로운 존재 이해를 위해 지금과 다른 철학적 원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이를 해명할 철학적 사유 틀을 제시하는 것은 지성에게 주어진 고유한 과제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의무와 과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공부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여기에는 자연철학적 관점뿐 아니라 사회철학적 관점 역시 배제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런 선언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먼 옛날에나 들어보던 철지난 한가한 소리로 들리는가? 그렇다면 분명 우리 시대의 지성은 자신의 과제와 의무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 한국 대학은 너무도 분주하다. 1,000억에 달하는 글로컬 사업비를 수주하기 위해 바쁘고, 대학혁신지원 사업을 따내기 위해 수도권의 거의 모든 대학이 학과 조정에 내몰리고 있다. 거의 해체 수준에 이른 한국 대학은 이 위기를 벗어나려 허덕이느라 지성의 과제를 수행할 여유는커녕 그에 대한 인식조차도 사치가 되었다. 교육이나 학문에 대한 이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교육 관료와 정치가 장관은 고등교육 예산과 권력으로 대학을 통제하는 데 모든 관심과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교수와 대학을 채근하여 전문지식 관료로 만들려는 노력은 이미 엄청나게 성공했다. 그들은 위험한 학문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쓸모없음의 쓸모를 알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찰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에 굴종하는 교수 개인은 교수평가를 위한 수치 맞추기에 급급해 도저히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 풍요와 성장에 찌든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를 재촉하고 있기에 조금만 늦어도 시대에 뒤처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 시대정신이나 문명의 전환, 성찰적 지성 따위의 말은 철없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대 담론이 아니어도 좋다. 최소한 한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전망하고 지금의 삶을 성찰하는 지성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죽어가는 대학과 교수의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지성은 어디서 움트고 있을까? 


신승환 가톨릭대학교·철학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생명의 특성을 해석학적으로 성찰하여 이를 바탕으로 서구 근대성을 극복하는 탈근대의 철학을 모색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철학: 생명과학 시대의 생명 이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문화예술교육의 철학적 지평』, 『지금, 여기의 인문학』, 『철학, 인간을 답하다』, 『해석학: 새로운 사유를 위한 이해의 철학』, 『행복과 삶의 해석학』, 『형이상학과 탈형이상학』, 『포스트휴머니즘의 유래와 도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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