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우는 연구
상태바
마음을 비우는 연구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3.06.11 13: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동일 칼럼]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마음을 채우고 있는 잡것들을 걷어낸다는 말이다. 왜 마음을 채우고 있는 잡것들을 걷어내고 마음을 비워야 하는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걷어내면 멀리까지 보인다. 이것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열차의 비유를 들어 말하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자중(自重)을 줄여야 하중(荷重)을 늘일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멀리까지 보면 크고 중요한 일을 더 잘할 수 있다. 

개별적인 사실이나 지식에 집착하지 않아야, 전후좌우의 맥락을 파악하고 총체적인 고찰을 할 수 있다. 사소한 시비에 말려들지 않아야, 커다란 문제의식을 가지고 차원 높은 연구를 할 수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다투는 상극에 매몰되지 않고, 누구에든지 혜택을 베풀어 커다란 상생을 이룩할 수 있다. 천하만세공공(天下萬歲公共)을 위한 학문을 할 수 있다.

“아는 것은 힘이다.” 전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말이 달라져야 한다. “아는 것은 짐이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왜 말이 달라져야 하는가?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에는 지식을 극소수의 특권층이 독점하고 통제하면서, 유식을 자랑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몇 종류 되지 않은 책이 희귀하고 고가였다. 교육이 제한되고, 책을 읽어서 알 것을 알 수 있는 기회도 균등하지 않았다. 

세상이 너무 달라져, 지금은 지식이 넘친다. 누구나 교육을 받고 글을 안다. 책이 감당하기 어렵도록 많아졌다. 인터넷이라는 것이 생겨나, 지식이 어마어마하게 집성되어 있고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사람이 만든 지식이 사람을 잡아먹게 생겼다. 이것은 전 세계에 닥친 공동의 위기이다. 쓰레기가 늘어나 지구를 파괴하는 것만 걱정하면 어리석다.  
 
조금 전에 두드리니, ‘지식’이라는 것이 114,000,000건 올라 있다. 숫자가 너무 많아 읽기 어렵다. 1억1천4백만인가? ‘지식’을 ‘정보’라고 하는 것이 예사여서, ‘정보’는 어떤가 알아보니, 971,000,000건 올라 있다. 9억이 넘는다는 말이다.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없다. 그 모두가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고, 국제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지식이나 정보가 서로 번역되어 거대한 규모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많은 지식을 가져와 머리에 넣으면 특권층의 위세를 갖추고 유식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리석다는 말만 듣는다. 지식의 총량이 국력이라고 하는 말이 전연 타당하지 않다. 지식은 힘이 아니고 짐이다. 너무나도 무겁고 심각하고 위험한 짐이다.  

짐이 많으면 운신에 지장이 있어 자기 생각을 하기 어렵다. 아무 것이나 짊어지지 않고 아주 요긴한 것만 엄격하게 선별해 이용해야 한다. 선별을 하려면 감식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 안목은 비판 능력에서 생긴다. 비판 능력은 깨달음을 얻어야 생기고, 깨달음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열띤 토론을 해야 다져진다.

학문은 깨달음을 갖추어야 한다. 깨달음을 갖추면 학문을 즐겁게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학문이 마지못해 하는 고역이다. 학문이 즐겁다고 하면 고역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쪽에서는 위선이라고 헐뜯는데, 제대로 하는 학문의 즐거움은 다른 어느 것보다 크다.

깨달음을 갖추지 못한 학문은 하기 힘든 것만 문제가 아니다. 사이비 학문이어서 쭉정이이거나 속임수이다. 쭉정이는 자기를 허탈하게 하기나 하지만, 속임수는 세상에 해를 끼친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여기고 갑질을 일삼으면서, 속임수로 학문을 방해하는 교수가 늘어나는 사태가 심각하다. 깨달음을 갖춘 학문을 하도록 하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다.

학문의 깨달음은 어떻게 하면 이루어지는가?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댈 곳을 찾자. 불교의 깨달음을 스승으로 삼으면 얻을 것이 있고, 반면교사라고 여기면 더 유익하다.

불교에서는 한꺼번에 다 깨달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학문은 거듭 깨닫는 과정이다. 완성이란 있을 수 없고 계속 나아간다.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유한한 노력이 학문이다. 먼저 깨닫고 나중 깨닫고, 더 깨닫고 덜 깨닫고, 크게 깨닫고 작게 깨달은 것이 모두 소중해, 차등을 이루지 않고 대등하다.

학문의 참선은 일정한 방법이 없다. 어디서 언제든지 해도 된다. 시끄러워도 가능하고, 잠잘 때 큰 소득을 얻기도 한다. 대화하고 토론하면 많은 진전을 이룬다.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오래 궁리하고 끝까지 추구하면, 어둠을 헤치고 한 소식 들려올 수 있다. 문제의식과 집중력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다른 요건을 잡스럽게 추가해 논의를 흐리지 말아야 한다. 

한 소식이 어떻게 오는가?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원근 산천의 진면목이 드러나듯이,  아무 관련이 없다고 여기던 것들이 서로 이어진다. 막혔던 물이 힘차게 흐르고 붉은 해가 솟아오르듯이, 숨어 있던 구조가 나타나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내 마음 어딘지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라고 시인이 노래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을 무어라고 일컫는지 정해진 말이 없다. 새로운 명명을 해야 발견한 것이 형체를 가지고, 창조가 시작된다. 다른 사람은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해, 참고로 삼을 수 있게 한다. “상생(相生)이 상극(相克)이고, 상극이 상생인 생극(生克)의 원리”가 다가오는 것을 학문을 하는 지침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계속 뻗어나는 연구를 아주 신명나게 한다. 

“있음이 없음이고, 없음이 있음이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괄하는 총론이기만 하므로 각론은 필요로 하지 않다. “상생이 상극이고 상극이 상생이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론이면서 개개의 사실을 실상에 맞게 논의하는 각론이다. 총론을 크게 열고 각론으로 나아가는 길을 확보하면 가만있을 수 없고, 새로운 탐구를 계속해서 창조의 성과를 내지 않을 수 없다. 연구거리가 봇물처럼 쏟아져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학문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학문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마음을 비워야 깨달음을 수 있다. 깨달음을 얻는 학문을 해야 스스로 즐겁고, 좋은 결실을 얻어 남들에게 나누어주며 널리 유익한 봉사를 한다. 좋은 길을 버려두고 왜 구태여 고역을 택해, 자기도 세상도 괴롭게 하는가?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