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문학은 기억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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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문학은 기억 투쟁이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6.03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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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의 문학정치 | 양진영 지음 | 지식과감성# | 202쪽

 

5·18은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된 후 권력을 폭력적으로 장악한 신군부에 대한 국민 차원의 저항으로 1980년 5월 이후 광주 지역의 문인들은 군사 정부의 폭력과 그로 인한 인권 침해를 문학이나 예술 활동 등을 통해 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문학은 공권력의 강압에 의해 침묵했던 언론을 대신해 대항 기억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들 지역 소설가들은 군사 정권의 감시와 탄압이 엄중한 시대에 5·18의 희생과 의미를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선, ‘어두운 시대의 작가들’로 불러 마땅할 것이다.

저자는 지난 40여 년간 5월 문학에 대한 연구가 서사의 의미에 방점을 두어 죄의식, 부끄러움, 트라우마와 치유, 민중성 등 몇 개의 범주 내에 머물러 왔음을 반성하면서 이들 작가들은 총 대신 펜을 통한 저항을 선택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 책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문학정치 이론에 기대어 5월 소설의 정치적 성격을 살펴보고 있다.

1980년 5월 25일 제3차 궐기대회에서 광주항쟁 시민군의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선언문을 통해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라고 항변한다. 저자는 5월 문학은 이런 기억을 재현한, 문학적 기억 투쟁에 다름 아니며 5·18의 글쓰기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문학 투쟁의 효과를 산출해 왔다고 본다. 

이 책에 따르면 임철우의 『봄날』 등 다수의 5월 소설은 하위 계층을 초점자나 초점화 대상으로 내세워 그들의 말과 사물을 가시화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문학을 통한 사회 참여적 행위 즉, 문학의 기억 투쟁(the struggle for the memory)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이런 방식의 기억 투쟁을 ‘문학이 스스로 행하는 정치 행위’라고 정의 내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용되는 ‘문학 투쟁’이라는 개념이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의 ‘문학정치’ 이론에서 기원됐음을 밝히고 있다. 랑시에르는 문학이 행하는 정치를 ‘텍스트에 표명된 의미’에서 찾지 않고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에서 찾는다. 이런 시각에 근거해 저자는 작가의 정치 참여와 무관하게 문학이 하위 계층을 가시화시킴으로써 산출되는 사회 참여적 효과를 ‘문학 투쟁’ 혹은 ‘문학의 정치적 투쟁’으로 정의한다. 이에 따라 이 책에서는 5·18을 배경으로 하는 5월 문학 작품들을 랑시에르의 문학정치 개념을 경유해 미학적 정치성으로 구명하는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그동안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연구는 작가의 정치적 활동이나 텍스트에 표명된 정치적 주장을 통해 판가름돼 왔다. 그러나 랑시에르에게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가 아니며 ‘문학이 정치 행위를 그 자체로 행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연구를 통해 그동안 5월 문학을 역사적 상처와 죄의식의 표명에 치중한, 소시민적 서사물로 보았던 견해를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다수의 논문과 평론이 임철우 『봄날』, 최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등 5·18의 대표작을 사회 참여적인 민족 · 민중문학에 기여하지 못하고 개인적, 관념적 차원에 머무르는 비정치적 텍스트로 평가해 왔다. 그러나 이들 소설은 랑시에르적 사유로 보면 미학적 정치성을 내포하는 정치적 텍스트로 독해가 가능해 5월 문학 연구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연구 결과가 근대 이후 지금까지 지속된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논쟁 등 예술과 정치를 둘러싼 이항대립적 구도에 균열을 낼 수 있음을 강조한다. 랑시에르의 문학정치론은 문학에 표명된 언어의 지시성과 작가의 주장을 통해 정치성을 판단해 왔던 관행과 달리 문학이 그 스스로 정치성을 수행함을 함축한다. 따라서 저자의 연구는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의 타율성 같은 대립적인 개념을 넘어 한국의 근현대 문학을 재해석하는 데에 유용한 전거가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5·18과 유사한 학살을 경험한 유대인 지식인들은 피해자(유대인):가해자(독일인)의 구도를 벗어나 파시즘의 만행을 인류애적 문제로 확대해 왔다. 저자는 5월 문학의 경우도 정치적 성격에 대한 분석과 재평가 작업을 통해 홀로코스트 문학과 같은 인류 전체의 사건과 문학으로 확산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지난 40여 년간 피해자(광주 시민):가해자(군사 정권)의 구도 안에서 연구돼 온 5·18의 외연을 문학 텍스트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인류애:파시즘의 차원으로 확대하려고 한다. 그동안 5월 문학뿐만 아니라 5·18에 관련된 정치학, 사회학 분야의 연구도 학살 책임자의 규명과 처벌, 피해 시민들에 대한 보상과 사회적 치유 등에 주력해 온 양상이다. 저자는 이 책이 이런 구도를 넘어 5·18의 의미를 세계사적으로 확대하는 데 기여할 것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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