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와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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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와 비트겐슈타인
  •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3.04.3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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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빈 칼럼]

아무 관련 없을 것 같은 말들을 제목에 나열하였다. 그런데 이들을 연결하여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래전 비트겐슈타인을 읽으면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가르친 그가 한 말의 여운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생들에게 ‘되도록 학교에서 일하지 말고 학교 밖 세상에서 일하라’하는 말이다. 이게 뜬금없는 게, 자신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는 학교를 떠나 일할 것을 주문하는 게 인지부조화가 아닌가. 

마치 퇴계선생이 남명선생에게 ‘출사하셔서 개혁하시라’라고 했더니, ‘선생은 한사코 벼슬이 싫다고 물러났으면서, 왜 나에게는 벼슬을 하라고 하시오’라는 핀잔을 들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어쨌든지, 비트겐슈타인의 인생을 돌아보면 이해가 되는 편이다. 캠브리지 천재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교육대학 졸업 후에 초등교사로 일하였으나, 학생체벌 사고로 인해 다시 캠브리지로 돌아온 경력을 생각하면 그의 말은 순수한 의도로 읽힌다. 학교에서 강의하면서도 끝없이 학교 안의 세상과 사람들을 혐오했으며, 살아있으면서도 평생을 죽음충동과 동행했던 그의 인생을 생각하면, 천재의 통찰이거나 학교가 생산하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냉소일 것이다. 요란하게 유명했던 러셀(그의 스승이다)과 목요회 멤버였던 케인스, 버지니아 울프 등도 그의 냉소적 무관심 대상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의 기묘한 언사 - ‘학교 밖에서 일하라’ - 는 한국으로 빙의하여 나를 점수돈오(漸修頓悟)에 이르게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영화 ‘기생충’이 세계를 흔들게 되면서이다. 그 후 한류의 위상과 한국인의 의식은 상상할 수 없는 양과 질적인 도약을 수반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예민하게 논쟁을 끌고 갈 의도는 없다. 그냥 사회의 변화상을 보면서 다담(茶啖) 하듯이 말하고 싶다. 

한류로 인한 우리의 대외의식과 외국의 한국인식의 극적인 변화를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학교(학계)와 엘리트 계층(‘사’자 직업꾼, 정치꾼)에게서 감명받고 그로 인해 거대한 의식변화를 경험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내가 떠올리는 비트겐슈타인의 학교가 상징하는 것은 자신들이 구축한 기득권 체계에 안주하는 ‘고상한 척하는 비천한 놈들의 세계’이며, 그 외부는 ‘비천하지만, 독창적인 사고의 세계’이다. 학교 밖은 독창성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 비천한 놈들은 학교의 지식꾼처럼 고상한 척 안주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천한 세계가 고상한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현상이 기쁜 것을 보니 나는 전생에 비천한 세계에서 살았음이 틀림없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 BTS와 BLACK-PINK 등등. 한류가 동서양 차단벽을 하나하나 깨부수는 요즈음, 문득 깨닫는 것은 한국의 변화는 고상한 세계가 아니라, 비천하다는 세계에서 시작하여 학교로, 또한 학교가 키운 저 잘난 ‘사’자 엘리트세계로 확산하고 있는 현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학교의 그 위선의 모습, 겉으로 고상하지만, 안에는 비천한 생각으로 가득한 꼬라지를 간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교는 엘리트 특권층의 발판이며, 이들은 엘리트주의라는 높은 옥상에서 아래를 내다보며 우쭐대며 산다. 그 나라의 문명 수준은 노벨상의 숫자로 대변되어왔는데, 그래서 김대중의 노벨상은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이상하게 숭미-보수 엘리트는 인정을 안 한다. 아마 흙수저 출신인 그의 노벨상이 고상한 특권층의 숭미-보수주의를 거슬러서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학교와 결탁한 고상한 지식-권력-자본 카르텔은 노벨상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한류에서 노벨상에 필적하는 업적들이 쏟아지고 있다.

한류의 세계는 엘리트주의가 건설한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그동안 천시받았던 비천한 세계의 급부상이다. 학교는 엘리트 계층을 만들고 그 안에서는 서로 공정한 비판보다는 나누어 먹기로 권세를 유지해 왔다. 물론 엘리트 중에는 하부구조의 민중과도 잘 어울리자고 하는 강남좌파(북카페 막시스트)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정치적 이념경계 밖에서는 문화적 엘리트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각종 합법-편법의 틀을 이용하여 학벌 특권집단을 지향하려는 측면에서는 역시 비천한 세계와 차단벽을 치고 산다. 결국, 정치적 이념에서 좌우 대립구조는 문화적 엘리트계급 욕망에서는 다 같은 패거리이다. 

그러나 한류의 세계는 불특정 다수에게 무제한으로 노출되어 심판받는다. 학벌이 구축한 엘리트 체계에서 상호평가는 흐지부지 끝이 나지만, 한류 세계에서 불특정 다수의 평가는 엄격하고 가혹하다. 불특정 다수 시민은 비판의 강약과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이른바 한류의 세계는 학벌과 상호연고주의를 무력화한 개방사회이다. 한류 스타와 감독, 문화예술인들은 자수성가한 흙수저가 주류인 게 이 때문이다. 지식과 자본, 권력으로 학벌과 대통령까지 만들 수 있지만, 세계적 스타와 감독, 예술가를 만들 수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학교를 떠나라던 이유는 아마도 엘리트주의를 혐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온갖 사기질로 특권만을 유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엘리트보다 제멋대로 혼자 크는 천한 놈들의 세계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였으리라 추론한다. 

오랫동안 대중문예계는 엘리트세계로부터 천한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한류가 세계적인 자랑거리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과거의 엘리트세계가 비천하게 바라보던 ‘각본과 연기, 춤과 노래’는 이제 세계무대에서 가장 한국의 독창성을 알리는 종목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지식과 권력 체계가 민중과 사회를 이끌고 글로벌 차원의 의식변화를 추동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가 낳은 정치경제 엘리트의 세계는 그런 도덕적이고 독창적인 능력도 열정도 거의 없다. 지식과 권력은 철저히 기득권세력이고, 민중문화와 예술은 그에 봉사하는 아래 것들이다. 그런데 21세기 아래 것들이 엘리트세계를 비웃듯이 사회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혹자는 한류의 내부에서도 비천한 모습이 많다고 비판론을 펴기도 한다.
 
그런데 CNN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학벌 좋고 돈 많은 대통령이 매춘부와의 성매매를 숨기려다가 들통이 났다. 그녀가 직접 인터뷰에 나와 당당히 떠들고 다닌다. 세상이 고매하다는 정치꾼과 더럽다는 매춘부 중에 누가 진짜로 고귀하고 추한 존재인지를 애쓰게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짜증 나게 엘리트세계의 우상인 ‘비아그라 청와대’, ‘성접대 당대표’, ‘부자집 망나니 자식새끼 마약과 음주운전’ 등등의 이야기를 강아지처럼 짖어대고 싶지는 않다. 사람의 고귀함과 비천함을 평하는 데 ‘생각과 의식의 장난’(가문, 학벌, 돈, 지식의 다과 등)에 사로잡혀 겉만 보고 재단하지는 말자. 그 기준에는 독창성과 열정 항목이 빠져있다.

오래전에, “그해 겨울의 낯선 서울역, 그 창녀 사타구니 같던 도시...”(김상렬 金相烈. 〈폭설〉. 《창비》. 1979년 여름)라는 표현을 기억한다. 창녀의 그것과 서울이 전부 추잡하다는 비유이다. 그런데 서울로 상징되는 엘리트 문명의 중심부에서 고상한 척 깝죽대는 지식꾼, 정치꾼, 종교꾼, 부잣집 망나니보다는 누구의 거기 냄새가 훨씬 소박하게 느껴진다. 트럼프와 매춘부, CNN, 낄낄거리는 시청자 중에 누가 더 고상하고 더 추한지를 가릴 필요 없다. 어차피 ‘뭐 팔고 뭐 먹기’ 세상에서 도덕적 승자도 패자도 없이 뒤에서 나누어 먹는 몫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른바, 엘리트 세계는 고상한 척하는 성매매 꾼들이나 다름없지만, 한류는 고상한 척할 수 없는 매춘부의 거기처럼 세상의 심미적인 눈들에 열려 있다. 

21세기, 학교 옆 비천한 골목에서 자수성가한 한류는 학교가 키운 세계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취임식에 오라 가라, 외국 방문에 콘서트를 하라 말라 하는 정치꾼들이 있다. 한류는 ‘그때 그 사람 요정’ 접대부가 아니다. 인생의 독창적 아이디어는 없으면서 시험만으로 지위를 차지한 응석받이 엘리트들이 무한경쟁 무대에서 독창성으로 승리한 한류를 우습게 보고 있다. 

그래서 한가지 걱정이 있다. 진솔한 한류의 세계를 위선의 엘리트체계가 압도하여 지휘봉을 도둑질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한류는 그렇다면 그들의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재편되어 기득권 체계의 노예로 편입될 수 있다. 소박한 시민과 팬들이 그들에 의해 심미적 취향마저 길들여지는 사태가 올지 모른다. 이왕이면 한류가 더 완벽하게 학교, 권력, 자본의 엘리트주의를 깨어 부수기를 바란다.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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