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묵적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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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적 동의
  • 이상룡 논설위원/부산대학교·철학
  • 승인 2023.04.16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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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칼럼]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 보자.

당사자들 사이의 협의 하에 고데기로 몸을 지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고, 원치 않을 경우 신고하는 것을 관련 법령에서 금지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점에 관하여 어떠한 약정도 신고도 하지 않았다면 동은과 연진은 고데기로 동은이의 몸을 지지는 데 합의한 것으로 봄이 옳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능력주의에 진심인 사람들은 늘 있어 왔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에서 흥미로운 판결이 하나 나왔다.

원고들의 주장과 같이 강의를 함에 있어 강의를 준비하고 성적평가 등 학사행정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통상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당사자들 사이의 협의 하에 이를 일정 시간으로 정하여 강의시간과는 별도의 근로시간을 추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고, 그러한 합의를 관련 법령에서 금지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점에 관하여 어떠한 약정도 하지 않았다면 원고들과 피고는 주당 강의시수만을 근로기준법상의 소정근로시간으로 정하여 근로계약을 체결하였다고 봄이 옳다.

그러니까, 강사가 대학과 근로계약을 체결하면서 강의시수만을 정하였고, 강의준비와 성적평가 등의 업무를 처리할 시간을 협의하여 근로시간으로 추가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으니, 그 시간들은 소정근로시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성실한 강의준비와 공정한 성적 평가를 원하는, 그리고 강사한테 그것을 요구할 권리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약을 맺지 않을 권력을 가진 대학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학은 왜 하지 않았을까?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은, 강의준비를 하고, 수업이 끝나고 난 뒤에도 찾아오는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과제물을 점검하고,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하고 성적을 매겨서 전산 입력을 하고, 성적 이의신청에도 성실히 답변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강의시간이 아닌 시간에 해야 하는 일이고,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없다.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교수와 강사가 다르지 않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교수와 강사의 수업은 다르지 않다. 강사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의 학점은 교수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의 학점과 다르지 않다. 교수와 강사의 강의는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지만, 그 임금은 열 배 이상의 차이가 있다. 교수들이 죽을 때까지 받는 연금까지 하면 그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를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자는 힘겨운 싸움이 퇴직금 소송이었다. 퇴직금 소송은 강의시간 외의 시간들도 근로시간으로 인정해 달라는 소송이었고, 지난 수십 년간 법원에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를 전면 부정하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 이 판결에 의하면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강사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둘이다. 강의시간에 동시에 강의 준비를 하는 것, 강의시간 외에는 질문을 금지시키는 것, 강의시간에 동시에 과제물에 피드백하는 것, 강의시간에 동시에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하고 성적 입력을 하는 것. 그런데 이런 신박한 능력을 가질 수 없는 대학의 강사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아무런 대가없이 그러한 일들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도 이런 일들을 강의시간에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이번에는 숙련을 이야기한다. 피고들은 그동안 대학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강좌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강의해왔고, 강의, 시험 출제 및 채점 등에 관하여 상당한 정도로 숙련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므로 강좌에 대한 강의준비 및 학사행정업무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대학에서의 강의는 기존의 학설을 단순히 교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며, 강의준비는 단순히 교과 연구로 국한되지 않는다. 강의준비는 동시에 학술연구이고, 학술연구에 들이는 시간은 정량화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적처리 등의 학사행정업무 시간은 정량화 할 수 있겠지만, 수업 피드백 등의 교육 지도는 그럴 수가 없다. 이는 전임교원이건 강사건 공히 똑같다. 그렇지 않다면 대학은 전임교원과 강사가 진행하는 강좌의 학점을 달리 했을 것이다.

사람은 동일한 일을 반복하면 숙련이 된다. 그런데 대학 강사도 숙련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수업준비 시간이 줄어든다고? 교육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가수 조용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노래를 수십만 번 부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처음이기 때문에 처음 부를 때 그 마음으로 부른다고. 나는 이 강의를 수차례 하지만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단 한 번 듣는다. 그런데도 수업 준비를, 그리고 수업을 소홀히 한다? 강사는 동일한 작업을 단순 반복하는 기계가 아니다.

사람들의 삶을 모르고 판결을 내린다면, 세상은 변하는데 그 변화에 둔감하면, 십 년이 지나도 판결은 달라지지 않는다. 법원의 판결이 때로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질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조인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썩어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는 현상과 불경기의 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조선이 썩은 것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을 인과관계로 보는 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약한 것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피해자는 열등한 자들이며, 열등하기 때문에 지배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강사 생활 십 년이면 영혼이 파괴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그러니 대학의 폭력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킨 강사들이 그저 돈 몇 푼 받기 위해서 퇴직금 소송에 나선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받고 싶은 것은 대학이 모든 강사들에게 당연한 임금 지급의 의무를 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의 강사들은 대학의 의무를 국가의 이름으로 명령하기 위해 퇴직금 소송을 제기했는데, 우리의 저 판사께서는 강사가 대학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한 것이라고 하니, 대학의 강사들은 이제, 동은이 그랬듯이, 사적 복수에 나서야 하는 것일까?


이상룡 논설위원/부산대학교·철학

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강사. 부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대학 개혁, 특히 비정규교수의 노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비정규교수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다. 「의사소통과 일치」, 「해명·치료·언어투쟁」, 「비트겐슈타인 삶의 방식의 변경」, 「대학 구조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벼랑 끝 비정규교수」,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고용구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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