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존재의 물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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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존재의 물적 증거
  • 석영중 고려대학교·노문학
  • 승인 2023.04.0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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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러시아 현대시의 해석』 (석영중 지음,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482쪽, 2023.02)

 

러시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 만델슈탐은 인간이 ‘존재의 물적 증거’(substantial proof of being)를 남겨놓지 않으면 인간은 공중에서 원무를 추는 하루살이 떼와 다를 바 없다고   단언했다. 그에게 시는 인간과 비인간(non-human)을 구분하고 인간의 존재론적 위엄을 확보해주는 가장 견고한 물적 증거였다. 『러시아 현대시의 해석』은 만델슈탐을 비롯한 시인들, 곧 블로크, 마야콥스키, 아흐마토바, 자볼로츠키가 혁명과 전쟁으로 얼룩진 20세기 러시아를 살아내며 지상에 굳건하게 새겨놓은 시적 ‘증거’를 살펴보는 책이다. 시대와의 불화로 처형당하거나(만델슈탐), 자살하거나(마야콥스키), 침묵을 강요당하면서도(아흐마토바)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고 그들의 시 한 편 한 편은 단단한 벽돌이 되어 러시아 시라는 이름의 거대한 성전을 구축했다.  
     
이 책은 각기 다른 창작 방식과 취지를 표방했던 다섯 시인을 하나로 엮어 주는 인자로 다의성(polysemy)에 주목한다. 초기 형식주의자들에게 다의성은 무엇보다도 시어의 자율성을 확보해주는 개념이었다. 그들은 시어의 본질이 의사소통 기능을 뛰어넘는 자율적 가치에 있다고 간주하여 내용 대신 형식을, 기의 대신 기표를 시학의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의미 연구의 완전한 폐기로 이어질 위험을 안고 있었던 이러한 입장은 ‘신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수정되었다. 티냐노프, 야콥슨, 그리고 무카르조프스키는 기표의 자율성이 아닌 기표와 기의의 관계, 그리고 기호와 지시대상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기호의 관계성, 체계성을 전제로 하는 의미의 다층성, 역동성, 변형가능성이 시어의 특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시어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역동적 단위이며 시어의 의사소통 기능과 심미기능 사이에는 우열관계가 아닌 ‘불안정한 균형'의 관계가 존재했다. 그들이 시어와 텍스트, 그리고 텍스트 외적 요인과의 관계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시스템으로서의 언어에 집착하였다면 로트만을 비롯한 러시아 기호학자들은 바흐친의 기본 명제인 과정으로서의 언어를 중심으로 다의성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과정으로서의 언어, 과정으로서의 텍스트, 그리고 과정으로서의 예술은 언제나 다른 언어, 다른 텍스트, 다른 예술과 교호한다. 따라서 로트만 기호학에서 모든 언어 기호는 메타기호가, 모든 예술 텍스트는 메타 텍스트가 된다. 

다의성은 시인의 개별적인 텍스트는 물론이거니와 작품 전체의 의미론, 그리고 시인의 총체적인 비전을 함축한다는 사실 때문에 텍스트 해석의 핵심이 된다. 다섯 시인의 상반되는 미학적 원칙은 여러 다른 기능과 목적을 갖는 다의성을 창출하고 역으로 다의미적인 시어는 리얼리티와 예술의 문제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시각을 반영한다. 상징주의 시인 블로크의 경우 지상의 모든 것은 천상적인 것의 반영에 불과하므로 기호도, ‘기호의 기호’도 본질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들의 끝없는 자기 해체에서 생성되는 다의성은 무한히 제자리걸음을 하는 텅 빈 우주의 환영을 창출한다. 만델슈탐은 말의 모든 자질, 기본적인 의미와 부차적인 의미, 소리, 형태, 연상을 숭배했으며 말 속에서 인류문화의 시원과 성장과 영생을 발견했다. 그에게 말은 시인 자신의 존재에서부터 대문자로 써지는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압축시켜 보유하는 소우주였다. 아방가르드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마야콥스키는 큐비즘의 회화적 장치인 ‘전위’(shift)를 시 텍스트에 도입하여 의미의 해체와 자리바꿈을 시도했다. 그의 이른바 ‘의미보다 넓은 말’은 관례적인 의미론의 테두리를 넘어서, 마치 큐비스트 화폭에서 부분부분 해체되어 그려지는 오브제들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스스로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시켜 나가는 말이다. 요컨대 마야콥스키의 다의성은 고정된 의미의 요소들이 전통적인 프레임을 열고 나와 움직이고 뒤집혀지고 위치를 교환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아흐마토바와 자볼로츠키는 이들 세 시인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갔다. 전통적인 의미를 과격하게 패러디하는 자볼로츠키의 시와 고집스럽게 독백적인 자아를 주장하는 아흐마토바의 장시는 다의성의 개념 자체를 입체적으로 조망하게 해준다. 자볼로츠키가 구체적인 사물의 시학에서 명상의 시학으로 건너간 것, 그리고 아흐마토바가 서사의 구조 속에 완고한 서정적 자아의 위상을 굳혀놓은 것은 모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두 시인은 예술로서의 모더니즘이 이데올로기변화의 프리즘을 거치며 굴절되는 과정을 텍스트 속에 구현함으로써 다의성의 의의를 통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20세기 러시아 시인들에게 말은 말 그 자체이자 문학에 대한 환유이자 삶에 대한 은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의성이란 단순히 의미론과 화용론 영역에서 하나의 말이 갖는 다양한 의미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연상의 망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 쓰기와 시 읽기라는 인간 행위의 존재론적 고찰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개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다의성은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의 세상에 무거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동안 인공지능(AI)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시 쓰는 AI’가 미디어에 등장하더니 곧이어 AI가 썼다고 하는 시집이 출간되었다. 최근에 출시되어 IT업계의 판도를 뒤엎고 있는 챗GPT는 성능이나 활용도 면에서 뿐 아니라 인간 사유의 근간을 뒤흔드는 포괄적인 인지 능력 면에서 검색엔진의 패러다임을 넘어 인간의 창조 패러다임을 완전히 재편성할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AI의 창조능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에 경탄하고, 혹자는 그럼에도 AI가 인간의 창조성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 예측하고, 또 혹자는 AI의 능력을 잘 활용하는 ‘협업’ 모드의 개발이 앞으로 인류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 모든 진단과 예측은 시와 관련하여서는 요점을 비껴간다. 다른 언어, 다른 텍스트와 역동적으로 교호하는 시는 시인과 그것을 해독하는 독자 간의 대화이자 문화적 자아와 문화적 타자 간의 활발한 의식교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AI가 쓴 시와 그것을 읽는 독자 사이에는 그러한 의식교환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화로서의 시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인은 만델슈탐이다. 그는 병 속에 든 편지의 은유로써 시를 묘사한다. 항해자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이름과 운명을 기록한 메시지를 밀봉된 병에 담아 망망대해를 향해 파도에 띄워 보낸다. 먼 훗날 이국의 해변에 파묻혀 있는 병을 발견한 사람은 그 안에 든 편지를 읽고 사건이 일어난 날짜와 죽은 수부의 마지막 의지를 알아차린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항해자가 파도에 병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훌륭한 시를 읽는 것은 모래 언덕에서 병을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발견해줄 후대의 독자를 향해 시를 쓰는 한편 다른 시인이 이미 쓴 텍스트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해석한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은 시인의 존재 속에서 동질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시인-독자인 그와 다른 시인-독자 간의 교감을 기록한 그의 시는 과거와의 대화이며 미래와의 대화 가능성을 함축하는 문화적 영속성의 한 고리가 된다. 시인의 윤리적 사명감은 이런 식으로 실현되는 바의 문화적 영속성에서 비롯된다. 문화를 발견하고 읽고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러시아 시인들이 생각한 윤리의 토대였다.

대화로서의 시는 독자에게 독특한 자질을 요구한다. 만델슈탐에게 이상적인 독자는 은닉된 기호와 상징과 다의적인 표현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독자이다. 그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시적으로 읽고 쓸 줄 아는’, 곧 ‘시적인 리터러시’를 지닌 사람이다. 반면에 시적인 문맹은 언어에 대한 본유의 감각을 상실한 사람, 본질적으로 ‘언어 없는’ 사람이다. 시적인 리터러시는 잘 만들어진 시, 아름답게 표현된 시를 향유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시(광의의 문학)는 직관적 향유와 인지적 사유를 동시에 수반하기 때문에 시의 창조와 독서는 시적인 리터러시를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시가 존재의 물적 증거인 이유이다. 따라서 시적인 리터러시와 관련되는 한, AI가 인간과 경쟁을 하느냐 마느냐,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능가하느냐 마느냐는 사실상 전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AI와 인간 시인-독자가 공존할 수 없고 공존해서도 안 되는 영역에 대한 인식이다. 시적인 리터러시가 무의미해지고 문화의 영속성이 파괴되고 시인의 윤리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반드시 인간의 문학과 인공의 문학은 구분되어야 한다. 존재의 물적 증거는 인간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석영중 고려대학교·노문학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슬라브어문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푸쉬킨, 마야콥스키, 아흐마토바 등, 러시아 시인들의 작품과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자먀틴의 소설을 번역했으며 『뇌를 훔친 소설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매핑 도스토옙스키』 등 여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푸쉬킨 작품집 번역에 대한 공로로 1999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쉬킨 메달을 받았으며 2000년도에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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