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신퇴(功成身退)의 삶을 살고자 했던 이백(李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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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신퇴(功成身退)의 삶을 살고자 했던 이백(李白)
  • 윤인현 인하대학교·한국어문학
  • 승인 2023.04.0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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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읽기_ 『이백 시에 나타난 자서전』 (윤인현 지음, 경진출판, 448쪽, 2023.02)

 

『이백(李白)의 시(詩)에 나타난 자서전(自敍傳)』은 이백의 시 1,100여 편의 시 중 비교적 그의 일생을 알 수 있는 시 134제 중 176수를 선정하여 삶의 일면을 살핀 글이다. 대 문호인 이백의 삶은 우리네 삶과 어떻게 다르고 같을 수 있는지 그 궁금증에서 출발한 글쓰기였다. 

이백의 조상은 농서 성기(진안) 곧 지금의 중국 감숙성 천수 지역에 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의 5세대 조상은 본적인 농서 성기 지역을 떠난 서역에 위치한 안서도후부였던 쇄엽 곧 지금의 키르키스스탄 비슈케크 동쪽에 위치한 토크마크 지역의 아크베심으로 이주하여 이백이 5살 때까지 살았다. 그리고 이백이 5세 되던 해 중국 사천성 강유 청련향으로 이주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다.

유년 시절의 이백은 한족(漢族)답게 육갑(六甲)을 외우고 경서(經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을 습득하였으며 시부(詩賦)를 창작하면서도 검술을 익혀 호협(豪俠)한 의기(義氣)를 길렀다. 당시 당나라 궁중은 도교에 경도되어 있어, 이백도 그 사회적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백의 10대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시 작품 하나를 감상해 보자.


      「방대천산도사불우(訪戴天山道士不遇)」-대천산 도사를 방문했는데 만나지 못하다
                                     
          물소리 속에 개 짖는 소리 들리고,                  犬吠水聲中(견폐수성중), 
          복숭아꽃은 이슬 짙게 머금고 있네.                桃花帶露濃(도화대로농).  
          나무 우거져 이따금 사슴 보이고,                   樹深時見鹿(수심시견녹),
          계곡의 한낮인데도 종소리 들리지 않네.          溪午不聞鐘(계오불문종).
          야생 대나무는 푸른 산기운을 가르고,             野竹分靑靄(야죽분청애), 
          튀는 샘물은 푸른 봉우리에 걸렸네.                飛泉挂碧峰(비천괘벽봉). 
          도사가 간 곳을 아는 이가 없으니,                  無人知所去(무인지소거), 
          시름에 겨워 두세 그루 소나무에 기대노라.      愁倚兩三松(수의양삼송).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와 개 짖는 소리 그리고 도화가 만발하고 사슴이 노닐며 종소리마저 들리지 않고 푸른 대나무가 펼쳐져 있을 뿐만 아니라 폭포수가 세차게 흐르는 곳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그 무릉도원에 도사를 찾아갔는데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소나무에 기대어 고민하고 있다. 도교에 귀의할까? 아니면 속세로 돌아갈까? 이것이 10대 말 이백의 모습이다. 이는 단순히 도교에 귀의하고자 하는 생각인지 아니면 도교와의 인연을 맺기 위한 행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이백의 20대 초반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면, 도교와 인연을 맺기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이백은 지역의 관리나 명사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보여, 장차 출사(出仕)의 뜻을 보였기 때문이다.

출사의 꿈을 안고 유년 시절을 보낸 사천성을 떠나는 시도 있다.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아미산 달을 노래하다

      아미산의 가을 반달,                                      峨眉山月半輪秋(아미산월반륜추),
      달빛 평강강에 비춰 물 따라 흐르네.                影入平羌江水流(영입평강강수류). 
      밤에 청계를 떠나 삼협†으로 향하는데,             夜發淸溪向三峽(야발청계향삼협), 
      그대 그리며 못 본 채 유주(渝州)로 내려간다.    思君不見下渝州(사군불견하유주).

† 삼협(三峽)은 장강삼협으로 사천성 봉절(奉節)에서 호북성 의창(宜昌)사이에 있는 구당협(瞿塘峽)·무협(武俠)·서릉협(西陵峽)을 이르는 말이다.


24살(724) 이백이 촉의 아미산(3,092M)을 떠나 유주(지금의 중경)로 향하면서 지은 7언 절구이다. 아미산 위에 가을 반달이 떠 있고, 달그림자는 평강강(지금의 청의강)에 비치어 물과 함께 흐른다. 밤에 청계에서 삼협으로 향할 때, 달이 협곡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다. 삼협은 협곡이라, 협곡 안에서 하늘의 달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나 볼까 저제나 달을 구경할까 하며 기대감으로 삼협을 지나는데 어느 듯 날이 새고, 나는 유주(중경)로 간다는 것이다. ‘그대’는 달을 이른다. 아미산과 장강(長江)의 지류인 평강강, 사천성 건위현의 청계역 그리고 삼협과 유주(중경)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시에서는 자기가 지나가는 지명을 연결시키면서도, 그 연결이 매끄럽고 어색함이 없다. 고향을 떠나는 서운함과 달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절묘하게 지명 속에 녹아 있다. 그래서 만고의 절창(絶唱)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렇게 사천성을 벗어난 이백은 호북성과 강서성을 유람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지역의 명사들과 문사도 겨루는 만유(漫遊)를 계속하였다. 만유 중에 장강 지역에서 보고 들었던 이야기와 노래들을 이백 특유의 낭만적 풍으로 악부시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그 악부시 중에 절창으로 꼽히는 「장간행(長干行)」은 소꿉놀이하던 친구가 부부가 되어 장사를 떠난 남편을 바람만 불어도 걱정이고 낙엽만 져도 근심한다는 내용으로, 남편을 그리는 애틋한 정을 표현하였다. 또한 이 무렵 쓴 글이나 시에는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공을 이루고 나면 자연으로 물러나 여생을 보낸다.’는 내용이 많다. 곧 공성신퇴(功成身退)의 생각을 드러내었다.

계속된 만유에도 뜻을 얻지 못한 이백은 27세 되던 해에 호북성 안육에서 허씨 부인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출사를 위한 만유는 계속 되었으며, 결국 42세에 당나라 황제인 현종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당시 현종의 한 말에는 ‘이백이 도교의 도의를 많이 아는 것으로 소문이 나서 현종 자신이 평민인 이백을 알 수 있었다.’고 한 내용이 있다. 이는 계속해서 이백이 도교와의 인연을 이어가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당나라 궁중에 입성한 이백은 정책을 입안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현종의 술벗 정도의 역할이었다. 당나라 궁중에서는 환관 고력사와 간신인 이임보 그리고 양귀비의 육촌 오빠 양국충 등의 부패 정치가 자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간신배들을 풍자했던 이백이다. 하루는 술이 잔뜩 취한 이백을 현종이 찾았다. 티벳에서 온 사신의 편지에 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편지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백뿐이라고 아뢰자, 급하게 이백을 수소문했던 것이다. 이때 이백은 양국충에게 먹물을 갈게 하고 고력사에게는 자신의 신발을 벗기게 하였다. 이런 일들이 결국 궁중에서 쫓겨나는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양귀비와의 사건도 있었다. 


                                   「청평조(淸平調)」 삼수(三首) 중 제2수
                                    
    한 가지 붉은 꽃에 이슬 내려 향기 엉기니,                  一枝紅艶露凝香(일지홍염로응향),
    구름과 비로 변하는 무산선녀로 애간장을 끊게 하네.   雲雨巫山枉斷腸(운우무산왕단장).
    묻노니 한나라 궁궐에서 누가 이와 같은가?                借問漢宮誰得似(차문한궁수득사),
    어여쁜 조비연도 새로 단장했을 때만이라네.               可憐飛燕倚新妝(가련비연의신장).


양귀비를 모란꽃에 비유하면서 초나라 양왕의 고사를 인용하였다. 초나라 양왕(襄王)이 고당(高塘)에서 놀 때 꿈속에 무산의 선녀와 정을 나누었다. 그런데 이별에 즈음하여 그 여인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찾아오겠소.’라고 하였다. 단잠에서 깬 양왕은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고 단장(斷腸)의 아픔을 느꼈다는 고사이다. 양귀비가 무산선녀처럼 곱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동티가 되었다. 양귀비를 한나라 때 미인 조비연에 비유하였는데, 조비연이 기녀 출신이었던 것이다. 고력사가 양귀비에게 ‘이백이 당신을 기녀인 조비연에 비유했다.’고 고자질했던 것이다. 이런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

궁중에 쫓겨난 44세의 이백은 낙양에서 두보를 만나 유람을 하였고, 당나라 황실과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도교에 귀의하는 도사의 도록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2차 출사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30대 1차 유람과 같이 전국을 유람하면서 각 지역의 명사나 관리를 만나기도 하고 자기를 적선으로 추켜세워 준 퇴임한 하지장을 만나로 회계 땅으로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회계와 금릉(남경) 땅을 떠돌면서 산동성 동노에 두고 온 두 아이가 생각나 인편으로 안부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을 만나 고단한 삶을 의지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그런 중 750년에 4번째인 종씨 부인을 만났다. 하지만 이백은 출사에 대한 기대로 도교에 귀의한 원단구도 만났으며, 유주절도사 막부에 판관직을 맡고 있는 친구 하창호를 만나러 가기도 하였다. 이때 이백이 유주에서 목격한 것은 안녹산의 군대가 힘을 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나라 궁중에서 쫓겨난 10년쯤 되던 53세의 이백은 경제적으로 많이 쪼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지방 관리의 호화로운 잔치를 보면서도 진작 자기 자신은 대우받지 못함에 서운한 감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 예전에 간신 재상 이임보에 의해 쫓겨났던 최성보를 만나기 위해 안휘성 경정산으로 가서 그를 만나기도 하였다. 이 경정산에는 이백 자신을 당나라 황실에 소개해주었던 도우 옥진공주가 머물고 있었다.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
                               
                뭇새들 높이 날아가 버리고,              衆鳥高飛盡(중조고비진),
                외로운 구름 홀로 간 뒤 한가하네.      孤雲獨去閑(고운독거한).
                서로 보매 둘이 물리지 않는 것은,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다만 경정산이 있을 뿐이네.              只有敬亭山(지유경정산).


모든 새들도 높이 날아 둥지로 날아가 조용하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외로운 구름마저 홀로 떠난 뒤에는 오히려 한가롭다. 다만 서로 바라보는 것은 나와 경정산인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물리지 않는 것은 경정산뿐이다. 유심한 이백이 무심한 경정산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를 추천했던 옥진공주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심한 경정산만 알 것 같다.

이백이 55세 되던 755년 11월에 안녹산이 난을 일으켰다. 난이 터지자 이백은 종씨 부인이 있는 남창으로 갔다. 그리고 남쪽 율양과 금릉, 추포와 여산 등지로 피난지를 택해 난의 어려움을 피했다. 56세의 이백이 여산(廬山) 피난지에 머물고 있을 때 현종의 16번째 아들 영왕 이린이 강릉대도둑이 되어 이백을 삼고초려하여 그의 막부에 들게 하였다. 이는 세력을 잃은 현종이 권력의 분산 정치로 태자 이형과 영왕 이린에게 각각의 권력을 내린 것이다. 이 같은 정책은 숙종으로 등극한 이형의 반발을 가져왔으며, 이린의 군대는 반군으로 전락하였다. 이로 인해 이린의 막부에 참여했던 이백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 귀주성 야랑으로 귀양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귀양길에 올랐던 이백은 1년 3개월 만인 759년 2월에 구당협 백제성 부근에서 사면령을 받았다. 이백의 기쁜 마음을 표현한 시를 감상해 보자.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아침 일찍 백제성을 출발하다
                                    
       아침에 채운 속의 백제성을 떠나,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천 리의 강릉길을 하루에 돌아왔네.         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
       강 양쪽엔 원숭이 울음소리 끝없고,         兩岸猿聲啼不盡(양안원성제부진),
       가벼운 배는 이미 첩첩 산을 지나왔네.     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꽃구름 속에 출발한 배는 천리길 강릉을 하루 만에 돌아왔다고 하여, 사면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게 하였다. 귀양에서 풀려난 이백은 또다시 출사를 위해 61세의 노구를 이끌고 이광필 군대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환으로 인해 합류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는 이백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때 이광필 군대가 진압하고자 했던 대상은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혹한 세금으로 인해 봉기(蜂起)했던 것이다. 지나친 출사욕은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이후 말년을 함께 보내던 종씨 부인도 도교에 귀의하게 되자, 이백 자신은 떠돌이 신세가 되어 안휘성과 금릉(남경), 다시 안휘성 등지를 떠돌다가 762년,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임종가인 시를 감상해 보자.


                             임로가(臨路歌)-길을 떠나다(임종의 노래)
                              
      대붕이 날아올라 팔방을 떨치다가,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중천에서 날개 꺾여 힘이 미치지 못하네.            中天摧兮力不濟(중천최혜역부제).
      남은 기풍은 만세에 떨치겠지만,                       餘風激兮出萬世(여풍격혜출만세),
      부상나무에서 노닐다 왼 소매가 걸렸다네.          游扶桑兮掛左袂(유부상혜괘좌몌).
      후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 전하려 해도,     後人得之兮傳此(후인득혜지전차),
      공자(孔子)가 없으니 누가 눈물 흘려줄까?           仲尼亡兮誰爲涕(중니망혜수위체).


이백 자신을 대붕에 비유하였다. 자신이 지닌 큰 기상을 떨치기 위해 팔방을 날뛰다가 그만 날개가 부러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당나라 궁중에 들어가서 치자(治者)로서의 능력을 떨치고 싶어 했지만, 그 뜻을 펴기도 전에 쫓겨났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남은 기운은 세상을 떨칠 만한데, 그만 도교의 언저리에 노닐다가 왼쪽 소매가 걸렸다는 것이다. 이는 제대로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작은 장애물로 인해 뜻을 접게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이백이 지녔던 유가의 공성신퇴(功成身退) 정신을 전하려 해도 공자(孔子) 같은 성인(聖人)이 없어, 알아주는 이도 없고 그 뜻을 전하려 해도 전할 수 없어 슬프다는 것이다.

시는 그 사람의 인생을 반영하고 있다. 이백의 한시에 나타난 이백의 삶은 우리의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출사하여 우리 이웃과 사회에 대한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자 했고 또 그 삶을 살고자 꾸준히 노력했다는 것이다. 젊은 날은 패기와 의협심으로 당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출사한 후에는 간신배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간신들을 풍자했다는 일화들이 이백의 그 시절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위국을 위해 다소 무모하게 덤벼들었던 부분도 있었다. 이는 『논어』 「태백」편 ‘독신’장에 “나라에 도가 있는데 가난하고 또 천하게 지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자가 되고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느니라.”고 한 구절이 있다. 간신배들의 잘못으로 국정이 혼란에 빠져 세상에 도가 행하지 않는데 처신을 조심하지 않고 아무 때나 출사하려고 한 것은 부끄러운 점이 심히 있다, 이백이 일의 공정함과 정의로운 점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내의 말류에도 이린의 막부에 참여한 일과 농민들의 가혹한 세금 추징으로 일어난 농민 봉기를 탄압하려는 이광필 군대에 참여 하고자 한 일은 심히 부끄러워야 할 일이다. 

이백이 도교에 의지하고자 했던 부분은 도교 귀의나 자연 은둔의 목적이 아니라 당나라 황실과의 연줄을 위한 행위로 간주되고, 그의 사상의 중심에 흐르는 것은 유가(儒家)의 공성신퇴(功成身退)의 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백에게 출사의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에게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이백은 그만 옷소매가 부상 나뭇가지에 걸려 자신이 지녔던 재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생을 마쳐야 했다.


윤인현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선비학당과 전통문화연구회에서 經書 공부를 했으며, 西溟 鄭堯一 선생으로부터 四書를 師事했다. 대표 저술로 『한국한시비평론』(아세아문화사, 2001), 『한국 고전비평과 고전시가의 산책』(역락, 2004), 『한국한시와 한시비평에 관한 연구』(아세아문화사, 2007), 『한국한시 비평론과 한시 작가·작품론』(다운샘, 2011), 『한문학 연구』(지성人, 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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