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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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남 논설위원/인제대·법학
  • 승인 2023.03.1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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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남 칼럼]

누구누구의 정부라고 부르든 한국의 고등교육 정책은 그 종말을 향하여 천천히 때로는 급하게 내달려 왔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다가오던 그 끝이 최근 도드라질 정도로 가시적이다. 교육부는 3월 9일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이하 ‘라이즈 사업’)의 시범지역을 선정하면서 그 시나리오를 드러냈다. 라이즈 사업은 지방자치단체의 대학지원 권한을 확대하고 관련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지방자치단체 주도로 대학을 지원하도록 하여 지역과 대학의 동반 성장을 모색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유일무이한 고등교육 정책이다. 그 정책의 모호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라이즈 사업은 사실상 고등교육에 관한 국가의 책무성을 서서히 포기하겠다는 담대한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이 담고 있는 몇 가지 교육정치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라이즈 사업은 국가의 사무 가운데 일부를 떼어내어 지방자치단체로 넘기는 듯한 정치적 모양새를 취하지만, 실상은 헌법의 취지와 법률체계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하다. 현행 「대한민국헌법」에 의하면 대학의 자율성과 고등교육의 전문성, 즉 고등교육을 수행하는 대학의 제도, 재정 등은 법률로 정하고 이로써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학교법인에 관하여 도지사의 권한을 별도로 인정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의 경우와 같은 차원이 아니라면, 「지방자치법」과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에서 고등교육을 지방자치단체의 사무에서 제외하고 있음은 명확하다. 더욱이 「고등교육법」에 따르면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은 인격을 도야하고 국가와 인류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심오한 학술이론과 그 응용 방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고등교육의 책무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어디에 두는 게 효율적인지를 따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연방국가가 아닌 한 고등교육은 그 성질상 국가의 사무이며 또 그렇게 운영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는 고등교육의 책무성을 지방자치단체에 넘겨서도 안 되며, 더욱이 이를 분권이라는 언어로 포장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모두의 정치’가 가능한 (가칭)‘국가고등교육위원회’가 독립적으로 설치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법률을 그렇게라도 쉽게 우회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이 우세하다 보니 라이즈 사업에는 본질을 은폐하는 용어가 쉽게 사용되고 있는데, 라이즈 사업에 따라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게 될 ‘지역대학’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공허한 개념일 뿐이며 다분히 가식적이기까지 하다. 지방자치교육 자체도 고등교육을 제외하는 개념이며, 「고등교육법」 역시 고등교육의 기관에 (일반)대학, 산업대학, 교육대학, 전문대학, 기술대학 등의 학교를 열거하고 그 설립주체에 따라 국립, 공립 그리고 사립학교로 구분할 뿐이다. 아마 라이즈 사업은 지방대학이라는 용어에 갈음하는 개념으로 ‘지역대학’이라고 명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시범사업의 신청 자격에서도 드러났듯이 ‘지역대학’은 서울 등 수도권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을 의미한다. 윤석열 정부가 진심으로 고등교육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였다면 소수자를 잘라내는 식의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육은 그 형식이든 그 내용이든 사회 속에서 감출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비록 그 용어가 그럴듯하게 세탁되더라도 민주시민이라면 누구든지 그 본질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2년 뒤부터 전국 17개 시·도를 대상으로 라이즈 사업을 본격화하면 링크사업 등 국가 주도 5개의 현행 대학재정지원사업을 통합하면서 연 2조 원 이상의 재정을 지역 주도로 전환한다지만, 이는 그동안 교수노조, 고등교육단체 및 시민사회가 주장하는 오이시디 회원국의 평균적 고등교육재정 수준에 한참이나 모자라는 액수다. 그 평균적 수준에 도달하려면 향후 5년간 연평균 11조 원이 필요하지만 현재 한국의 고등교육에 지출되는 국가재정은 국가장학금 정도의 연 4조를 빼면 여전히 7억 원 정도가 부족하기에, 고등교육단체가 계속 주장하는 (가칭)「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의 제정이 필요하다. 단계적이고 전면적인 고등교육의 무상화를 지향하는 한편, 고등교육에 관한 시민의 접근권에 존재하는 차별을 철폐하는 실천이 여전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만약 매년 내국세의 20.79%와 교육세 일부의 합계로 정해진 교부금을 지방교육재정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초·중등교육의 경우처럼, 사립대학의 인건비와 경상비 등이 지원된다면 국가와 개인 사이의 공교육 분담구조가 균형을 이루고 국·공립과 사립대학의 균형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고등교육의 질적 향상은 물론 공공성이 강한 새로운 고등교육의 지역적 협력 체제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라이즈 사업은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질 높은 고등교육을 구현할 국가전략에 대한 정부의 자포자기 선언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진실은 지방대학의 체제를 주요 국립대학 중심으로 재편하고 사립대학을 외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라이즈 사업의 시나리오대로라면 각 지역은 거점 국립대학 등만 「고등교육법」상 ‘대학’의 역할을 하게 되고 살아남은 사립대학은 실무능력이 중시되는 기술대학·전문대학 등의 역할을 전담하게 될 것이다. 

고등교육의 치명적 한계는 공공성이 약하다 보니 그 접근 기회에 차별이 발생하고 이어서 서열화가 공고하게 되는 데 그 뿌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사립대학에 세금을 줘서는 안 된다’라는 식의 여론을 추동하고 또 그 흐름에 추수되면서 대부분 사립대학을 거세한 채 주요 국립대학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기획하고 있음이 바로 라이즈 사업의 본질이다. 따라서 현재 고등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대학에 균등한 정원 감축과 이에 비례한 국가의 재정지원, 대학의 무상교육과 공영형 사립대학의 모색, 개방이사제도의 개선 및 확대 등 사립대학의 공공성을 확대하고 지역마다 협력의 그물을 촘촘하게 짤 수 있을 정도로 대학의 자치와 민주주의가 충분히 구축되어야 한다. 학문과 교육은 이런 바탕이 아니라면 결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자치와 인권옹호, 그리고 학교의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근시안적 교육정책은 언제나 미봉책이었음을 이제는 그만 확인하고 싶다. 지방의 사립대학은 지금 충분히 가라앉은 상태다. 그렇다고 떠오르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며, 억누르는 무지의 벽을 스스로 깨며 넘어야 할 때다.


고영남 논설위원/인제대·법학

인제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민주법학』 편집위원이며, 전공은 계약법인데 교육법, 인권법, 법여성학, 사회철학, 사회과학방법론, 법인류학 등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경남 근현대사: 사건, 공간, 운동』(공저, 2023), 『여성과 몸』(공저, 2019), 『대학정책, 어떻게 바꿀 것인가』(공저, 2017), 『민법사례연습』(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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