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기록한 역사, 문자를 통해 복원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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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기록한 역사, 문자를 통해 복원한 역사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3.05 2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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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문자 사전 | 연규동 지음 | 따비 | 360쪽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일구게 된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발명품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문자를 빼놓을 수는 없다. 문자가 있었기에 얼굴을 직접 대하지 않고도 상업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문자가 있었기에 법률을 공포해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고, 문자가 있었기에 역사를 기록해 후세에 교훈을 남길 수 있었다.

이 책은 사물을 본뜬 그림이 하나의 단어를 뜻하게 되고, 하나의 음절을 표현하게 되고, 마침내는 하나하나의 낱소리를 표시하게 되기까지 문자의 발달 과정, 그리고 서로 다른 언어를 기록한 문자들이 영향을 주고받고 다른 문자에 흔적을 남긴 관계를 담고 있다.

1장과 2장은 문자의 발생과 확산을 다룬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한 인류 최초의 설형문자, 현재 사용되는 대부분 문자의 모태가 된 이집트 문자에서부터 알파벳 혁명을 이룬 페니키아 문자, 아시아 문자들의 기원이 되는 아람 문자까지, 인류의 초기 문명을 기록한 9개의 문자를 소개한다. 주로 중동과 지중해 인근 지역들에서 발생한 초기 문자들은 점차 세계로 퍼져나갔다. 

3장에서는 2,500년 동안 계속 사용되고 있는 에티오피아 문자, 이집트에서 사용된 네 번째 문자인 콥트 문자 등 아프리카의 문자들이 소개된다. 4장과 5장은 동서양 문명 교류를 담당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문자들을 설명한다. 아람 문자의 영향을 받은 시리아 문자는 종교와 함께 아시아로 흐르며 소그드 문자, 위구르 문자, 몽골 문자, 만주 문자 등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으며, 중국과 경쟁하며 중앙아시아에서 제국을 이루었던 소그디아나, 위구르, 몽골은 한자의 영향력 속에서도 동서양 문화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소그드 문자, 위구르 문자,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냈다. 

6장에서는 고대 인도의 종교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표기하는 데 쓰인 브라흐미 문자부터 방언만큼이나 다양한 인도계 문자를 다루며, 7장에서는 파괴된 문명의 자취를 간직한 마야 문자로부터 19세기에 인공적으로 만든 체로키 문자와 크리 문자처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문자들을 소개한다. 8장은 고대 교회 슬라브어를 기록한 글라골 문자와 세 가지 글자체가 있는 조지아 문자, 지금은 일상에서 사용되지는 않지만 여러 판타지 문학과 영화 속에서 화려하게 살아난 룬 문자 같은 유럽의 문자들을 다루며, 9장에서는 한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란 문자, 서하 문자, 여진 문자를 다룬다.

문자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사멸한 문자이거나 지금도 활발하게 사용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문자들을 소개하는 이 책은, 해당 문자가 발생한 지역과 시대, 기록한 언어 등에 관한 정보 외에도 문자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를테면, 문자와 필기도구의 관계다. 설형문자가 쐐기 같은 글자 모양을 갖게 된 이유가 점토판에 갈대줄기를 눌러 썼기 때문이라거나 룬 문자는 단단한 돌이나 금속판에 주로 새겼기에 문자 모양이 곡선 없이 각져 있으며 수평으로 그은 획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사실은 문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다.

또한 그 자신은 문맹이었던 인디언 세쿼이어가 라틴 문자의 모양만 참고해 만든 체로키 문자는 발음기관을 상형한 개별 문자들을 만들고 자질에 따른 획을 더하는 원리로 창제된 훈민정음과 비교해볼 만하다. 문자 창제에 관한 이야기만큼이나 흥미진진한 것이 문자 해독에 얽힌 이야기다. 절벽에 매달린 채 10년 동안 베히스툰 비문을 한 글자씩 옮겨 적은 롤린슨, 로제타석을 해독해낸 언어 천재 샹폴리옹, 히타이트 점토판을 해독한 흐로즈니 등, 문자 해독을 통해 역사를 복원한 언어학자들의 노력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문자를 다룰 줄 아는 서기 계급이 왕을 좌지우지할 권력을 휘둘렀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은 특정 계급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수단이었다. 문자가 뜻이 아니라 소리를 표기하게 된 후로는 누구나 글을 읽고 쓰는 데 장벽이 낮아지고 지식을 누구나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패권을 가진 민족/국가의 문자가 인근의 세계까지 지배한 역사가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인류는 자국의 언어를 반영하는 문자를 끊임없이 창제/차용해왔다. 문자는 그저 언어를 기록하는 수단에 그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발달에, 공동체가 정체성과 자부심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매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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