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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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 김성환 대진대·철학
  • 승인 2023.03.05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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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영화관에 간 철학: 중년의 철학자가 영화를 읽으며 깨달은 삶의 이치』 (김성환 지음, 믹스커피, 284쪽, 2023.02)

 

 

인간은 이성과 감정의 동물, 아닙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일까요, 감정의 동물일까요? 제가 쓴 『영화관에 간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입니다. <매트릭스> 4부작, <어바웃 타임>, <어벤져스: 엔드게임>, <기생충>, <그랜 토리노>, <그랑블루>, <다크 나이트> 3부작 등 22편의 영화와 BTS의 뮤직비디오 <Permission To Dance>로 철학의 5개 주제인 미래, 사랑, 재미, 관계, 정의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인간은 이성도 있고 감정도 가지니까 이성과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철학자들은 한쪽 편을 듭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하버마스는 인간이 이성의 동물이라는 쪽에 손을 듭니다. 스피노자, 홉스, 흄, 루소, 베르그손, 니체, 푸코, 들뢰즈는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라는 쪽에 손을 듭니다. 

이성과 감정이 둘 다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은 철학자들도 잘 압니다. 그러나 이성과 감정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기본이고 강한지를 정하지 않으면 인생과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일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대로 살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라고 저도 모르는 새 편들고 있습니다. 계산이 밝은 사람은 인간이 이성의 동물이라는 쪽을 편듭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놓고 선택합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게 되고 빨간 약을 먹으면 자기 정체를 찾고 저항군으로 살게 됩니다. 빨간 약은 자기 정체를 찾게 해주는 약, 자의식의 약, 이성의 약입니다. 네오가 이성의 동물 같죠?

하지만 네오의 최종 선택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네오는 매트릭스라는 가상 세계를 만든 아키텍트가 인류를 구하는 오른쪽 문과 사랑하는 트리니티를 구하는 왼쪽 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왼쪽 문으로 갑니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선 예수처럼 자기 목숨을 바쳐 인류를 구원합니다. 연인과 인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네오의 최종 선택 기준입니다. 


사랑은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

제가 좋아한 법정 스님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좋아하셨습니다. 특히 이 말을 좋아하셨죠.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어바웃 타임>

무슨 뜻일까요? <어바웃 타임>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팀과 메리의 결혼식 장면이 인상 깊습니다. 이탈리아 가수 지미 폰타나의 <이 세상(Il Mondo)>이 신부 입장곡으로 쓰입니다. 메리는 처음엔 싫다고 하지만 신랑과 아빠가 깜짝 놀라게 <이 세상>을 틉니다. 

착한 신부는 신랑에게 “널 위한 거야.”라고 소리 없이 말하며 어깨를 예쁘게 움직입니다. 신랑도 “일 몬도”라고 소리 없이 따라 부르며 제자리 댄스로 화답합니다. 아빠도 한때 놀던 가락으로 날렵한 춤 솜씨를 발휘하지만 엄마의 눈치에 동작 그만. 걸어오는 신부와 맞이하는 신랑이 주고받는 눈빛.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법정 스님이 서로 마주보는 사랑을 몰라서 함께 마주보는 사랑을 예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법정 스님은 서로 마주보는 사랑이 뭔가 문제가 있고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사랑이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 문제는 서로 마주보는 사랑이 감정의 인정이기 때문에 흔들리고 깨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와 어린 왕자는 서로 길들이는 과정을 거쳐 비밀을 공유합니다. 그 비밀은 어린 왕자가 소행성에서 기른 장미는 물 주고 벌레 잡으며 길들인 것이어서 지구에 핀 장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사랑은 서로 길들여서 비밀과 지혜를 공유하는 사랑입니다. <어바웃 타임>에서 팀과 아빠가 나누는 사랑이 모델입니다. 팀과 아빠가 공유하는 비밀은 자식을 자랑스러워 하는 아빠, 아빠를 자랑스러워 하는 자식이 되라는 가족 사랑입니다.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사랑의 원조는 소크라테스가 알려줍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이 부족한 것을 원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지혜(sophia)가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함께 사랑하는(philos) 것이 철학이라고 하죠. 함께 지혜를 추구하는 방법은 대화이고요. 대화가 길들이기의 원조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 참사랑이라는 생텍쥐페리와 법정 스님의 철학은 인간을 이성의 동물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물러서면 이 도시는 끝장

                                  <다크 나이트>

“우리가 물러서면 이 도시는 끝장이다”는 제가 <다크 나이트> 3부작에서 첫손에 꼽는 명대사, 명장면입니다. 이 말은 고담시 경찰 부청장 폴리의 입에서 나옵니다. 폴리는 고담시를 함께 지키자고 요청하는 경찰청장 고든을 문전박대한 적이 있습니다. 목숨이 아까워서요. 

그러나 매몰된 3천 명의 경찰이 배트맨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악당과 전면전을 벌이러 갈 때 폴리는 선두에 섭니다. 경찰들이 돌격하고 폴리는 장렬하게 죽습니다. 폴리와 3천 명의 경찰은 이성으로 돌격을 결정하고 합의하지 않습니다. 두렵지만 뜨거운 연대 감정으로 돌격합니다. <다크 나이트> 3부작은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라고 보는 세계관에서 나옵니다. 눈으로 감상하는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인간을 이성의 동물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을 감정의 동물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모더니즘은 이성이 병 주고 약 준다는 세계관입니다. 설사 이성이 교통난, 기후 온난화, 감염병 팬데믹을 낳더라도 이성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에 따르면 병 주는 이성은 도구이성, 약 주는 이성은 소통이성입니다. 하버마스의 도구이성과 소통이성이 뭔지 이해하려면 <디파티드>를 보면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라는 쪽에 손을 듭니다. 좋은 인생과 좋은 세상은 사랑, 재미, 공감, 연대감 등을 바탕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을 보면 “이성은 감정의 노예다”라는 영국 철학자 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키스만 50번째>를 보면 욕망은 생산하는 힘이라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긴 어게인>을 보면 “변신은 무죄”라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흄, 들뢰즈, 니체는 모두 저와 생각이 같습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김성환 대진대·철학

대진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파트너 채널에 이 책의 마중물이 되는 <김성환의 철학 한 컷>을 연재하고 있다. 새로운 자연 철학을 세우려는 꿈으로 근대 자연 철학을 연구해 『17세기 자연 철학』을 썼다. 그 외 『동물인지와 데카르트 변호하기』, 『서양근대미학』(공저), 『서양근대철학』(공저) 등의 저서가 있으며, 어려운 철학 내용을 쉽게 풀이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동물원에서 시작하는 사회탐구』, 『나꼼수로 철학하기』, 『영화로 생각하기』(공저), 『대중 음악 속의 철학』, 『나는 본다, 철학을』 등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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