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스템은 어떻게 민주주의, 돌봄, 지구를 먹어 치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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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스템은 어떻게 민주주의, 돌봄, 지구를 먹어 치우는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2.27 0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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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 낸시 프레이저 지음 | 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336쪽

 

암울한 우리 시대의 ‘가장 우아한 자본주의론’이라 평가받는 이 책은 저자 프레이저가 뜨거운 마음으로 써 내려간, ‘좌파의 길’에 대한 절절한 모색이기도 하다. 저자는 오늘날 교착 상태에 빠진 정치 위기와 숱한 사회운동의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통적인 고전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관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는 ‘확장된 자본주의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를 ‘식인 자본주의’라 명명하면서, 그에 맞서는 이론적·정치적 기획을 선보인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를 하나의 ‘경제’ 시스템으로 인식하면서 생산 영역 이면에 감춰진 ‘(노동)착취’에 주목했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를 (‘경제’를 넘어서는) ‘사회’의 한 유형, 즉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인식하면서 착취 이면의 ‘또 다른 감춰진 장소들’에 주목한다. 착취를 가능케 하는 네 가지 배경조건, 즉 전 지구적인 제국주의적-인종적 수탈, 돌봄 등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 지구 환경과 자연에 대한 수탈, 정치의 기능 장애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자본’의 파괴적인 속성이 근본 원인이며, 이러한 자본의 탐식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확장된 자본주의관으로 무장한 광범위한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신자유주의 이후 수많은 정치·사회운동과 비판이론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오늘날, 이 책의 주장과 대안은 우리에게 매우 깊은 영감과 각성을 준다. 페미니즘, 성소수자운동, 환경/생태운동, 노동운동 등 수많은 운동들이 각개약진하면서도 혼돈스럽게 뒤얽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와 페미니즘의 기묘한 동거라거나 극우 포퓰리즘의 만개 같은 전 지구적 현상들이 결국 하나의 근원(‘식인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으로 수렴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게 되기도 한다. 이 넘쳐나는 ‘정체성 정치’의 시대에, 이러한 ‘포괄적인 접근’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절박하고 시급한 과제일지 모른다.

경제 위기와 극우 포퓰리즘의 창궐, 기후 급변 등으로 어지러웠던 2010년대에 프레이저는 정체성 정치만 강조하며 분배 요구를 등한시한 사회운동들을 비판했고, 최근 극우 포퓰리즘이 상당수 대중에게 대안으로 선택받는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음을 통렬히 지적했다. 특히 페미니즘의 대중적 확산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낡은 틀에 갇혀 있는 여성운동을 향해 자기 성찰과 노선 전환을 촉구했다.

또한 프레이저는 무엇보다도 사회운동과 좌파정치 전반이 환골탈태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극우 포퓰리즘이 발호하도록 만든 원흉인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동맹에 바탕을 둔 ‘진보적 포퓰리즘’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운동, 여성운동, 생태운동, 흑인운동 등이 굳건한 동맹을 발전시켜야 할 근거를 ‘자본주의’라는 토대 자체에서 찾아낸다. 다만, 이 ‘자본주의’는 더 이상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야기하던 그 ‘자본주의’와 같지 않다. 자본-노동 관계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더 복잡한 제도적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의 새로운 자본주의관은 그 전모를 드러낸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노동은 불안정하고, 부채는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며, 생계는 위협받고 있다. 공공 서비스는 퇴보하고, 인프라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며, 생명을 위협하는 팬데믹과 극단적인 기후위기까지 엄습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법을 상상하거나 실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정치의 위기’가 이 모두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책은 이 모든 끔찍한 사태의 근원에 관한 심층 탐사다. 그 원인을 진단하고, 범인을 지목한다. 저자는 ‘식인’이라는 은유를 통해, 우리 시대를 이 지경에까지 몰아넣은 이 사회 시스템에 이름을 붙인다. 자기 존재의 토대조차 걸신들린 듯이 집어삼키는, 이른바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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