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에서 모더니즘은 어떻게 가능한가? - 식민지기 한국문학을 통해 본 모더니즘적 정치학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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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에서 모더니즘은 어떻게 가능한가? - 식민지기 한국문학을 통해 본 모더니즘적 정치학의 가능성
  • 최현희 한국외대·한국학
  • 승인 2023.02.26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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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도둑맞은 이름들: 한국 근대문학과 식민지 모더니즘』 (최현희 지음, 소명출판, 424쪽, 2023.01)

 

○ 한국 지도는 한반도 모양인가

육당 최남선이 주재한 잡지 『소년』 창간호(1908.11)에는 한반도 지도가 실려있다. 여기서 한반도는 대륙을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잔뜩 웅크린 호랑이 형상이다. 대한제국이 강성한 나라가 되기를 소망하는 강렬한 민족의식이 읽힌다. 하지만 육당은 이 지도가 자기 민족의식의 표상이 아니라 한반도 지도를 보고 당연하게 떠오르는 형상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육당에게 한반도는 웅크린 맹호로 비유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맹호인 것이다. 한마디로 육당은 한국=맹호라는 도식을 사실로서 제시한다. 이 도식이 사실로 정립되면 이제 한국인의 “진취적 팽창적” 기상도 당연해진다.

고토의 토끼 모양 한반도 지도(왼쪽)와 육당의 맹호 모양 한반도 지도(오른쪽)<br>
고토의 토끼 모양 한반도 지도(왼쪽)와 육당의 맹호 모양 한반도 지도(오른쪽)

육당은 『소년』 지면에 한반도를 맹호로 표현한 이미지를 출판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지도의 한반도 모양은 맹호가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육당에 앞서 일본 지구과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郎)는 한반도가 토끼 모양이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육당은 고토의 창안은 사실의 왜곡이고 자기의 생각은 사실 자체라고 한다. 고토의 토끼는 어떻게든 한국을 비하하려는 제국주의의 발로이며 육당의 맹호는 조국을 드높이고자 하는 민족주의 발로일 것이다. 양자는 그 의도에서 보면 이처럼 명백히 대립된다. 그러나 고토의 토끼나 육당의 맹호나 아무 근거 없는 자기만의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즉 그 이미지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이런 점에서 둘은 동일하다.


○ 한국이 먼저일까 한국인이 먼저일까

우리가 말하는 ‘한국’이라는 민족이나 국가는 무엇인가? 공통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일정 수의 인간들의 집단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몇 천만 명에 이르는 그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한국’에 속하는 사람들의 합의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 합의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여기서 육당의 맹호와 고토의 토끼로 돌아가 보자. 한국인이라면, 육당이 제멋대로 상상한 후 사실이라고 강변하는 한국=맹호 지도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선택함으로써 육당의 상상을 사실로 만드는 행위를 하고 있다.

‘한국’이 애초에 어떤 내용이 있는 게 아니라 육당의 맹호 이미지를 선택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로 ‘한국’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한국’은 거기 소속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선택으로 그 내용이 늘 새롭게 채워지는, 그 자체로는 텅 빈 이름이 아닐까? 육당이 한국=맹호를 한 컷의 이미지로 만들어 『소년』지에 출판한 일은, 따라서 한국이 기원하는 원(原)장면에 해당한다. 한국이 용맹한 기상을 지닌 한국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여서 한반도=맹호 이미지가 출판된 게 아니다. 그 이미지가 출판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한국인은 식민주의에 맞서는 민족으로서 이 세계에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이다.


○ 식민지 한국인은 진정 ‘모던’할 수 없는가?

『소년』 지상에 ‘한국’이 텅 빈 이름으로 식민지인들에게 주어진 순간은 민족주의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모더니즘(modernism)의 순간이기도 하다. 광의의 모더니즘은 근대성의 추구이며 근대성이란 곧 과거 부정과 현재에 대한 무한한 충실함을 의미한다. 기댈 수 있는 아무런 주어진 바 없이,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의식만을 공유하는 자들이 일시적으로 ‘한국’이라는 이름을 채우는 내용이 된다. 이 과정은 이름뿐인 ‘한국’을 실체화한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이지만, 근거도 없고 완성의 희망도 없다는 점에서 끝없이 이뤄져야 한다. 내가 사는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르는 사람들이 지니는 현재에 대한 공통 의식을 지향하는 태도는 지극한 모더니즘이다. 이 지향성은 또 극히 근대적인 매체인 잡지와 그것이 구성하는 출판문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점을 『소년』에 출판된 한반도=맹호 이미지는 명료하고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도둑맞은 이름들: 한국 근대문학과 식민지 모더니즘』의 주요 주장 중 하나는, 모더니즘의 미달태로 규정되곤 했던 식민지의 민족주의야말로 탁월한 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문예사에서 모더니즘은 흔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서유럽의 메트로폴리스에서 꽃피운 전위적 사조로 규정되곤 한다. 이에 비해보면 유럽 이외 지역의, 모더니즘적 현상들은 그 전위성이나 미학성의 정도가 미흡해 보인다. 쉽게 말해 비유럽 모더니즘은 진정한 모더니즘이 아니며 잘해야 유럽 모더니즘의 아류나 조야한 모방일 뿐이라는 것이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지방적 특수성에 함몰되어 현재를 무시하며, 식민지에서 산발적으로 보이는 모더니즘적 경향들도 그러한 민족주의의 구속 때문에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을 문면 그대로 해석하면 지역적 구분에 의거한 위계질서를 전제하는 태도야말로 반(反)모더니즘적이다. 모더니즘이 모던한 것의 추구, 즉 현재에 대한 충실함이라면, 그리고 ‘현재’란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면, 무수한 모더니즘들이 평등하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특정 지역·시대의 현재가 기타 지역·시대의 현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모더니즘에 역행한다. 

위에서 살펴본 『소년』 지상의 한반도 지도는 그것을 ‘우리나라 한국’의 자연스러운 나타남으로 받아들이는,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정신을 지닌 개인들이 임시로 구성하는 ‘한국’을 전제한다. 동시에 한국=맹호라는 사실은 아무 실체적 근거가 없으므로 이 ‘한국인들’이 그것을 자연스레 수용하는 선택을 할 때에만 유지된다. 따라서 그 이미지는 ‘한국’을 축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특정 역사적 맥락을 공유하는 무수한 개인들에게 공통의 현재가 생성되는 장이며, 이런 점에서 현재에 대한 충실성을 실현하는 지극히 모더니즘적 현상이다. 


○ 모더니즘은 미학적 식민주의가 아닐까

최재서가 주재한 『국민문학』(1941-45)의 창간호

『도둑맞은 이름들』의 또 다른 주요 주장은, 특정 지역과 시기에 나타난 모더니즘이 이상적 모더니즘이고 다른 사례들은 아류라는 논리는 모더니즘을 빙자한 식민주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이 책은 최재서의 국민문학론과 미키 기요시(三木清)의 동아협동체론을 든다. 이 중 국민문학론은 1940년대 전반기 동안 식민지 한국 문단을 장악한 비평담론으로, 한국과 일본의 민족적 통합을 정당화하는 기만적 논리를 담고 있다. 국민문학론의 심층 논리를 보면 식민본국 일본과 식민지 한국이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되는 것이야말로 양측이 처한 현재의 현실에 충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모더니즘적 논리가 발견된다. 

이 논리는 서양이 그 외 지역을 식민화하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탈피하여 동양이 자기의 현실에 충실하게 되고 그리하여 세계가 원래 존재해야 할 자연스러운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애초에 서양과는 본질상 다른 동양만의 현재를 설정하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현실’이라 볼 근거는 없다. 최재서는 ‘동양의 현재’에 충실하는 이상적 모더니즘을 실행코자 했으나 결국 ‘한국’을 포함한 동양 전체를 지배하려는 제국 일본의 식민주의에 부응하는 데로 귀결되고 말았다. 따라서 국민문학론은 모더니즘이 식민주의의 정당화에 손쉽게 동원될 수 있는 본질적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 모더니즘은 탈식민적 정치학의 자원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한편 모더니즘에는 탈식민적 정치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할 가능성 역시 있다. 이상(李箱), 최명익, 임화, 강경애, 문예봉의 텍스트, 그리고 작가, 운동가, 스타로서의 그들의 존재 양식은 모더니즘적 정치의 가능성을 보인 사례에 해당한다. 이 사례들에서 우리는 공통적으로, 기존의 어떠한 가치나 이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현재에 대한 충실성을 발견한다. 

이상의 「오감도 시 제1호」 (1934). 신문에 발표된 이 작품은 기존의 시 독법으로는 해석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당시 독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현재도 이상 텍스트는 온갖 이론적 실험의 장으로 남아 있다.해석불가능한 상황이 새로운 해석을 끝없이 낳고, 그 해석들이 축적되면서 어떤 해석도 권위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며 다시 해석불가능성이 강화되는 악무한이 성립한다. 이상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는 의미 없는 해석의 무한한 생성과 그 가운데 일어나는 텍스트 자체의 무한한 연장인지 모른다.

예컨대 이상은 문학작품과 그것을 형성하고 유통시키는 제도로서의 문학에는 어떠한 필연성이나 근거도 없다는 생각을, 글쓰기 과정을 무한히 연장시키는 퍼포먼스를 행함으로써 실천했다. 한편 임화는 유명한 ‘이식문학론’에서 한국 근대문학을 서양 근대문학의 ‘이식’으로 설정하는 도식을 제시했다. 이때 임화의 초점은 앞으로 나올 진정으로 모던한 한국 문학은, 서양적 근대로 다 회수되지 않기에 ‘한국’이라는 비서양 식민지의 이름으로 자기를 기꺼이 부르는 한국인들이 만들어갈, 미지의 것임을 주장하는 데 있었다.

임화 평론집 『문학의 논리』(1940). 여기에 한국 근대문학사를 서양 근대문학의 이식사로 규정한 「신문학사의 방법」이 실려있다.<br>
임화 평론집 『문학의 논리』(1940). 여기에 한국 근대문학사를 서양 근대문학의 이식사로 규정한 「신문학사의 방법」이 실려있다.

『도둑맞은 이름들』이 말하는 ‘도둑맞은 이름들’은 이처럼 근대 내내 식민지적 한계에 갇혀있어 자기의 의지대로 자기 이름의 내용을 채울 수 없었던 식민지인들에게 주어진 이름들이다. 한국 근대문학은 그러한 이름들 중 하나인 ‘한국’이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긴장 가운데 탄생하고 탈취되고 재탈환되는 생생한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도둑맞은 이름들』은 이러한 ‘한국’의 현장성, 현재성을 생생하게 기술하기 위해 ‘식민지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주어져있는 어떠한 과거적 이념으로도 완전히 고정되지 않는, 그리하여 식민주의자들에게 너무도 쉽게 탈취되어버릴 위험성이 있는 ‘한국’이라는 이름을 식민지인들은 그 위험성을 그대로 껴안은 채 자기의 이름으로 기꺼이 선언하곤 했다. 아무에게나 도둑맞아 아무렇게나 곡용되고 오용될 수 있는 게 내게 주어진 이름이라면, 나는 절망해야 할까? 그렇게 아무렇게나 부려질 수 있는 게 내 이름이라면 거기에 어떠한 내용을 채워 넣을지는 온전히 내게 달린 일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둑맞은 이름들』은 진정한 탈식민주의적 정치학의 가능성을 식민지 특유의 모더니즘에서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모더니즘의 정치적 효용성은 오직 근대 세계의 편만한 식민지성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통해서만 사고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최현희 한국외대·한국학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전공으로 석사를,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학 동아시아어문학과에서 일제 말기 한국 모더니즘 문학과 전체주의 문화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쿄외국어대학 총합국제학연구원 외국인연구자,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초빙교수, 서울대 대학원 비교문학 전공 강사 등을 지냈다. 『미래가 사라져갈 때』, 『다문화주의 시대의 비교문학』 등을 공역했고, 『동아시아 예술담론의 계보』 등을 공저했으며, 한국 근대문학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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