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바라드』 … 양자 얽힘과 비결정성 그리고 무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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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바라드』 … 양자 얽힘과 비결정성 그리고 무한성
  • 박신현 건국대·영문학 
  • 승인 2023.02.1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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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캐런 바라드』 (박신현 지음, 컴북스캠퍼스, 128쪽, 2023.01)

 

 

무한성은 유한성에 내재한다

“무한성은 모든 물질적 ‘유한성’의 구성적 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주의 깊게 듣는다면, 심지어 가장 작은 사소한 것들 안에도 내재하는 무한성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유한성은 결여가 아니라 무한한 풍부함이다. 유한성은 자신의 유한한 나타남 안에 무한성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캐런 바라드(Karen Barad)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단 한번 유한한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인생이 결코 덧없지 않으며 그 안에 무한성이 자리한다는 말은 큰 위로가 된다. 더군다나 이 말은 양자물리학이라는 과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믿을만한 위로로 다가온다. 2012년 바라드는 『무엇이 무의 측정 방법인가? 무한성, 가상성, 정의』에서 양자물리학의 중심에는 존재론적 ‘비결정성(indeterminacy)’이 있으며, 이 비결정성이 물질의 존재뿐만 아니라 비존재에 대한 열쇠라고 설명한다. 비결정성은 물질화의 중심에 자리한 끝없는 역동성이고 개방성이며 무한한 가능성들이다. 바라드는 양자장론을 논거로 이러한 비결정성이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 즉 존재를 탄생시키는 자궁이라고 강조한다. 이와 같이 바라드는 우리에게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마저도 물리학을 통해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바라드는 현재 신유물론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연구자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신유물론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지난 수십 년 간 지배적이었던 언어적 전회를 극복하고 물질의 물질성으로 돌아가려는 새로운 물결의 중심에 자리한다. 바라드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크루스캠퍼스(UCSC)에서 페미니즘 연구, 철학, 그리고 의식의 역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녀는 이론물리학으로 스토니브룩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과학연구자이기도 하다. 바라드는 양자물리학의 중요 개념들을 발전시켜 세계가 물질과 의미의 ‘얽힘(entanglement)’과 관계성으로 생성된다고 보는 ‘행위적 실재론’을 자신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윤리적 틀로서 제안한다. 바라드는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후기구조주의, 퀴어, 탈식민주의, 비판이론과의 관계 속에서 양자물리학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닐스 보어, 주디스 버틀러, 미셸 푸코, 도나 해러웨이 등의 통찰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차별화된 포스트휴머니즘 수행성이론으로 발전시킨다. 


모든 삶은 만남이다

“모든 현실적 삶은 만남이다. 그리고 각 만남은 중요하다.” 바라드는 2007년 대표 저서 『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Meeting the Universe Halfway)』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바라드에게 관계와 만남은 개체보다 앞선다. 그녀는 존재의 기본 단위를 독립된 사물이 아닌 ‘현상’이라고 본다. 그녀에게 현실의 기본 단위는 독립개체가 아닌 ‘관계들’인 현상이다. ‘얽힘’은 삶 속의 모든 것이 관계적인 과정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다. 바라드는 현실이 ‘내부ᐨ작용(intra-action)’하는 다양한 행위성들의 얽힘으로 구성된다고 보면서 세계의 존재론적 분리불가능성과 공간적 불가분성을 주장한다. 바라드의 신조어 ‘내부ᐨ작용’은 독립개체들을 전제하는 ‘상호작용(interaction)’을 대신하는 용어다. 바라드에 따르면 세계는 이러한 내부ᐨ작용의 역동적 과정이며 우주는 내부ᐨ작용으로서 계속 생성 중이다.

이와 같이 바라드의 이론은 ‘관계적 존재론’에 기초한다. 다양한 신유물론들 가운데서도 바라드의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은 양자물리학의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 존재의 본질적 관계성을 급진적으로 전달한다. 그녀는 2012년 인터뷰에서 ‘행위자(agent)’ 또는 ‘행위소(actant)’는 그녀가 제안하는 ‘관계적 존재론’에 반하기 때문에 자신은 이런 용어들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대신 ‘행위성(agency)’ 개념을 관계적 존재론에 적합한 방식으로 재작업하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녀는 행위성이란 타인에게 응답하는 능력, 즉 ‘응답ᐨ능력(response-ability)’이며 상호적인 응답의 가능성이라고 정의한다. 바라드는 양자 얽힘을 통해서 공간적 시간적으로 근접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의 존재가 얼마나 타자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나의 윤리와 책임이 널리 확장되는지 강조한다. 여기에는 나와 동시대가 아닌 타자들, 그리고 비인간 타자들도 포함된다. 

 

                                                                  Karen Barad

존재는 물려받음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물려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지금 존재는 무엇보다 물려받음이다’라고 데리다가 상기시키듯이, 이미 죽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빚을 현재의 우리 존재로부터 끊어낼 수 없다.”

바라드가 2010년 논문 「양자 얽힘과 계승의 유령론적 관계」에서 들려준 이 이야기 역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녀는 우리 존재가 물려받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질러 무수한 타자들과 관계 맺고 있으므로 타자에 대한 책임은 무한히 확장되고 도래할 진정한 정의를 향한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돼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바라드는 자신의 연구가 ‘정의와 윤리’의 문제들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항상 웅변해왔다. 그녀의 윤리와 정의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자크 데리다, 두 프랑스 철학자에게 크게 기대고 있다. 

바라드는 육체적 감수성에 기초하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원용해 우리 몸 자체가 타자들에 개방돼 있고 타자들과 얽혀 있으므로 우리는 타자들에 대해 ‘언제나 이미’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녀는 데리다의 ‘다가올-정의’ 개념을 원용해 우리의 책임은 살아서 현존하는 것들을 넘어서서 더 이상 없거나 아직 현존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책임으로까지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물리학을 통해 데리다의 ‘다가올-정의’ 개념에 신유물론적인 의미를 제공하고 ‘차연’의 철학을 물질적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녀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이 우리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와 내부-작용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단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계승한다”고 표현한다. 과거를 상속한다는 것은 곧 미래를 상속하는 것이다. 바라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항상 내부-작용하면서 재창조된다는 사실로부터 사회 정의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양자 얽힘의 측면에서 새롭게 사유될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바라드는 과거가 미래의 재작업에 개방돼 있지만, 그 흔적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녀는 과거 불공정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다가올ᐨ정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의 구성

나의 책 『캐런 바라드』는 바라드가 발표한 저작들을 연도순으로 좇아 1장에서 10장으로 나아가면서 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사유가 어떻게 더욱 깊어져 가는지 따라가고자 했다. 1장~5장은 행위적 실재론의 주요 개념들과 논리를 『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6장~10장은 바라드가 2010년부터 최근까지 발표한 최신 연구들을 정리한다. 바라드의 이론은 2007년 『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까지는 ‘양자역학’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2012년 『무엇이 무의 측정방법인가?』를 시작으로 ‘양자장론’을 면밀히 다루게 된다. 양자장론으로 확장되면서 얽힘과 기억, 비결정성과 무한성에 대한 바라드의 사유는 더욱 심화되고 윤리와 정의, 역사에 대해 더욱 명시적인 성찰과 전망을 제공하게 된다. 최근 연구로 올수록 물리학의 정치성에 대한 바라드의 관심은 더욱 깊어지며, 사회정치적 쟁점에 대한 발언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바라드가 지금-여기 있는 작은 물질 하나에도 무한성이 응축돼 있으며 각 소량의 유한성 안에 다가올ᐨ정의의 가능성이 자리한다고 했듯이, 이 책 『캐런 바라드』의 소박함 안에서 독자들은 무한한 풍부함을 발견하게 되길 소망해 본다.  


박신현 건국대·영문학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석사 학위와 영어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을 바탕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작품을 분석한 논문들 「행위적 실재론으로 본 울프의 포스트휴머니즘 미학」(2020), 「버지니아 울프 소설에 구현된 기술미학과 환경미학」(2020), 「회절과 얽힘의 텔레커뮤니케이션」(2021), 「캐런 바라드의 육체의 윤리와 정치: 자기ᐨ만짐과 다가올ᐨ정의」(2022)를 발표한 바 있다. 단독 저서로 『캐런 바라드』(2023)와 『공유, 관계적 존재의 사랑 방식』(2021), 공저로 『신유물론: 몸과 물질의 행위성』(2022)과 『생태, 몸, 예술』(2020)이 있고, 『강철혁명』(2011)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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