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우울한 환영과 무책임한 엘리트의 잔치 다보스 포럼, 그리고 대통령의 새도우 댄싱
상태바
근대의 우울한 환영과 무책임한 엘리트의 잔치 다보스 포럼, 그리고 대통령의 새도우 댄싱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3.02.09 04: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운택 칼럼]

올해 1월 중순에도 스위스의 다보스에서는 글로벌 정·재계 엘리트의 공개 향연이 열렸다. 매년 수백 명의 국제정치경제의 ‘의사 결정권자’가 스위스 산골의 조그마한 휴양지에 모여 ‘세계경제포럼’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행사이다. 이 행사는 지명을 따라 ‘다보스 포럼’으로 알려져 있다. 다보스는 기본적으로 국제정치경제 질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들이 자본주의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대놓고 계몽하는 장소이다. 국제질서의 향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G7 이외의 국가 엘리트는 이 모임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다. 국제질서의 흐름을 만회하기 위해 학습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폐쇄적 엘리트 블록에 부분적으로나마 참여하여 국제 엘리트와 조우하고 의존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냉전시대만 해도 사회주의 동조세력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조정하려고 했던 국제적 자본가들은 비교적 내밀하게 활동했다. 로스챠일드, 반더빌트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음모론의 수준에서나 회자될 정도로 국민국가가 사적자본의 이해를 충분히 대변하고 일정하게 조율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다소 요란스러웠던 ‘삼자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조차 브레진스키, 헌팅턴, 크로지어 등의 학자들을 내세워 전후 국제정치경제 질서를 재편하려고 했던 것에 비하면 다보스 포럼의 활동은 미디어 정치의 환경을 고려하더라도 요란스럽기 그지없다. 

1971년 포럼 발족 이후에도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이 포럼이 위세를 떨치게 된 계기는 냉전 종식 이후 자본주의 엘리트들이 단극질서 체제 아래서 대놓고 체제개편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일련의 크고 작은 경제위기가 있었고, 소위 디지털 전환이라는 자본주의의 변화를 앞장서서 주도하고 선전하고, 계몽하는데, 이만한 기구는 없었다. 최소한 보도자료에 실린 만큼의 책임감은 지고자 하는 국제기구와는 달리 이 비정부 자문기구에는 그만한 책임감이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이후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자본주의 질서를 재편하였던 세계화는 코로나19 이후 산산조각이 났다. 감염에 따른 생산 중단, 빈곤, 기후변화와 같은 요인 외에 전쟁을 동반한 지정학적 블록화는 급기야 전 지구적 차원에서 사회의 철두철미한 시장화를 기도하였던 세계화 전략에 차질을 빚게 하였다. 이 포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화폐와 상품의 국제적 이동이 평화의 보증수표라도 되듯 외치더니 이제 주요 참가자들인 미국, 중국, 유럽의 주요 국가조차 그들의 국제무역관계를 ‘의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은 공급, 투자 및 판매시장으로서 파트너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보면 이는 상호 관계의 약점이기도 한데, 스스로를 ‘협박에 취약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날 국제질서의 목표는 더는 ‘자유화’나 ‘세계화’가 아니라 ‘자율’과 ‘전략적 주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년 전 코로나19를 기회로 경제·사회·교육·노동 등 모든 것을 다 혁신하자는 ‘위대한 리셋’(Great Reset) 개념을 내놓았지만, 주요 국가의 무관심만 불러왔던 세계경제포럼의 주최 측은 이번에도 ‘지정학적 바람이 협력에서 경쟁으로 바뀌고 있어 세계시장 붕괴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뻔한 진단을 내놓았다. 위대한 리셋이 망가진 세계화의 구태의연한 버전으로 매력을 주지 못했듯, 지정학적 블록 형성의 원인은 보지 않고, 대화와 교류의 복원만이 마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이야말로 이 포럼에 대한 줄어드는 관심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책임감 없이 환담이나 나누는 국제 엘리트 포럼의 진정한 위기는 지정학적 블록 형성, 전 지구적 빈곤, 기후재앙 등이 현재 질서의 결과인데도, 단지 질서의 결여라고 믿고 있다는 데 있다. 즉, 세계경제포럼 엘리트의 다수는 아직도 자본주의의 위기가 경제시스템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운영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 당연하게도 국제정치경제질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는 이미 빠른 속도로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 동시에 대안의 부재는 빠른 속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포퓰리즘에 내주고 있다.

무책임하고 무력한 엘리트의 결사체로서 다보스 포럼은 어쩌면 운명적으로 예고된 바 있다. 다보스에는 20세기 위대한 작가 토마스 만의 걸작 ‘마의 산’에서 유럽의 병들고, 신경쇠약에 걸린 부르주아 환자들이 선택한 요양원이 있고, ‘근대’의 우울한 환영이 꿈틀거리는 곳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다보스의 자랑이기도 한 이 요양원에 교양시민이고자 하는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는 멀쩡한 몸으로 들어와 모더니즘의 환영에 시달리는 여러 명의 환자를 만나면서 진짜 환자가 된다. 그는 자신을 계몽하려는 네 명의 교육자와 만나면서 진보와 염세, 관능과 쾌락 등 모더니즘의 향기를 경험하지만, 결국 어느 것도 내면화하지 못한다. 이들은 강한 신뢰보다는 불안감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베르크호프 요양원에서 인식의 지평은 넓혔으나 궁극적으로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무기력해진 카스토르프는 참전이라는 선택을 한다. 전쟁이 그의 문제를 해소시켜 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영혼의 자유로움은 필요했으니 말이다.

위대한 리셋과 지정학적 바람으로 갈팡질팡하는 다보스 포럼은 유사한 인상을 준다. 국제정치경제질서에 무책임한 엘리트들은 세계 시민사회에 신뢰를 주기는커녕 모호한 협력의 시그널을 주었을 뿐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최소한 국제사회의 변화마저 읽지 못한 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셸 위 댄스’ 아닌 기업가 정신으로 세일을 한다는 ‘쉐도우 댄싱’만 추고 왔다. 작년 UN 연설에서 나 홀로 ‘자유와 가치의 연대’를 외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든 보수든 국제사회에서 연설하려면 기본적인 시대 흐름과 정서는 읽고 가야 하지 않나? 검사 출신 대통령의 협소한 식견이 핑계가 된다면, 대한민국 권력 엘리트라도 이를 바로잡아야 할 텐데, 대통령이 탁월한 역량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그분들의 역량과 국제적 감각은 도통 보이질 않는다. 이러니 국민이 카스토르프식 선택을 해야 하나? 21세기에도 낡은 모더니즘의 우울한 환영이 드리워져 암담하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한국이론사회학회 회장, 비판사회학회 편집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하였고,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은 바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