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에티카(Ethica) - 인간, 몸 그리고 싱귤래리티(Singul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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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에티카(Ethica) - 인간, 몸 그리고 싱귤래리티(Singularity)
  • 이재복 한양대·국문학
  • 승인 2023.02.05 2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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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에세이]

요 며칠째 겨울 추이가 매섭다. 창 밖에 몇 주 서 있는 은행나무의 메마른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쩡쩡하다. 해마다 보는 겨울 풍경이지만 올해의 그것은 유난히 을씨년스럽고 그늘이 깊어 보인다. 삼년 여를 끈 이 환란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두들 살다보니 겨울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이맘때쯤이면 늘 여행 가자고 하는 지인들이 있었는데 올해는 여태 연락이 없다. 이제 모두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웬만한 일은 ‘줌(Zoom)’에서 만나자고들 한다. 특히 거리의 개념이 무화되다 보니 대면 상황에서 발생하는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이 없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삼년 동안 이런 방식의 삶에 잘 적응해오면서도 나는 내내 허전함과 함께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생각을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그 허전함과 허기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내 ‘몸’이 그것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 혹은 줌 속에 있다 보면 내 자신이 몸적인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게 된다. 모니터 속의 상대와 대화를 하고 그것이 드러내는 이미지와 소리에 집중하는 순간 내 몸의 존재성은 의식에서 사라져버린다. 이 망각은 내 자신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몸이 의식 속에서 망각되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뇌’일 수밖에 없다. 요즘은 모든 것이 ‘뇌’로 통한다. 바야흐로 뇌중심주의 시대의 도래라고 할 수 있다. 이 뇌의 극대화가 우리 시대의 지상 목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싱귤래리티(Singularity,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시점)’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이 지점에 이르면 현재의 인류와는 다른 인류, 곧 ‘포스트휴먼(Posthuman)’이 탄생하게 되고, 이때부터 새로운 역사(‘인류세 Anthropocene epoch’)가 시작되는 것이다. 캔 리우 같은 SF 작가들의 소설에서 다루어지면서 널리 대중화된 이 개념들은 허구화된 상상 정도로 간주하기에는 ‘지금, 여기’에서의 실질적인 관심과 그 욕망의 정도가 너무 크다. 마치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인류의 필연적인 삶의 목적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부정과 저항은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몸이 없고 뇌만으로 된 세계. 몸이 없는 뇌란 그것이 더 이상 자연과 우주의 흐름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에서 분리됨으로써 뇌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뇌를 임의적으로 해부하고 복제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로서의 인간의 존재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 새로운 기억과 물질, 새로운 윤리와 도덕을 토대로 하는 탈인간의 존재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몸이 배제된 상태에서 뇌를 토대로 성립된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일반적으로 자연과 우주의 연속선상에 있는 몸을 토대로 성립된 세계는 처음에는 ‘카오스(혼돈)’ 그 자체이지만 이것이 차츰 ‘코스모스(질서)’로 이행해가는 궤적을 지닌다. 그렇다면 몸 없이 뇌를 토대로 성립된 세계도 이런 궤적을 지닐까? 

뇌 특히 인공지능을 통해 성립되는 세계는 수학적인 알고리즘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코스모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완전함이란 알고리즘 바깥을 포괄하지 않은 상태에서 알고리즘으로 구축된 일종의 ‘매트릭스’일 뿐이다. 가령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는 기계로 이루어진 가상 세계이다. 이것이 가상세계라는 사실은 매트릭스 밖, 즉 ‘시온’이라는 세계(존재)를 통해서이다. 시온에서 보면 매트릭스는 완벽한 전체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불완전한 세계일 뿐이다. 왜 시온의 존재를 알고 있는 네오와 트리니티 등은 매트릭스의 세계와 목숨을 건 싸움을 전개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 매트릭스가 가짜이기 때문이다. 진짜 같은 가짜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곧 진짜가 지니고 있는 ‘아우라’를 매트릭스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때가 멀지 않았다고들 한다. 이미 어떤 부분에서는 넘어선 것도 있다. 하지만 결코 인공지능이 넘어설 수 없는 것도 있다. 뇌가 아닌 인간의 몸을 통해 드러나는 그 숱한 아우라를 인공지능 안으로 수렴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뇌 중심의 인공지능이 참숯의 향이 배인 고기의 맛이라든가 아욱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된장국의 맛을 해명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정지용 「향수」)이라든지 아니면 ‘먼 곳 여인의 옷 벗는 소리’(김광균의 「설야」) 같은 눈 오는 밤의 소리에서 스며나오는 그 언어의 아우라를 해명할 수 있을까? 이런 맛과 언어가 있는 한, 우리가 그것들을 망각하거나 상실하지 않는 한 하나의 존재로서의 인간 혹은 하나의 존재로서의 몸과 언어는 뇌 중심의 문명이 결코 지닐 수 없는 아우라를 그 세계 내에 은폐하게 되는 것이다. 

몸이 사라지고 뇌가 그것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온갖 말과 이미지가 흘러가고 있다. 이 뇌 중심의 문화와 문명은 몸을 중심으로 하는 생명과 생태 문화·문명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림자의 확산은 생명의 빛의 약화내지 소멸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언어에서 배어 나오는 빛이 진정한 아우라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인간의 몸의 언어는 뇌에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결정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자연-우주로 이어지는 ‘전체로서의 큰 몸’에서 만들어진 생명의 언어인 것이다. 인간의 몸의 언어는 제도화된 틀을 넘어서는 생명의 본능이 빚어내는 저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비어져 나오는 한 줄기 빛(아우라)과 같은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저 싱귤래리티의 도래가 우리 인류에게 빛이 아니라 그림자라는 사실을 우리 몸은 알고 있다. 캔 리우의 「카르타고의 장미」에서 에이미는 “내 생각에 몸은 저 나름의 지능이 있다. 정신은 결코 하지 못할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줄 아니까”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에이미가 말하는 ‘몸의 지능’이란 싱귤래리티로의 이행을 거부하는 일종의 ‘저항선’ 같은 것이다. 이 저항선은 ‘매트릭스’의 견고함 속에 난 틈과 같은 것으로 그 틈으로 빛이 스며들어 그림자의 어둠을 삭이고 풀어내는 살아 있는 생명의 알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의 몸이 그런 저항선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시 인간의 몸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에 토대를 둔 새로운 윤리를 정립해야 한다.  


이재복 한양대·국문학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현대문학의 흐름과 전망』,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몸과 그늘의 미학』, 『내면의 주름과 상징의 질감』, 『벌거벗은 생명과 몸의 정치』, 『정체공능과 해체의 시론』 등이 있다. 김준오시학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젊은평론가상, 애지문학상(비평), 편운문학상, 시와표현평론상, 시와시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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