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은 문명의 이기가 될 것인가, 흉기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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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은 문명의 이기가 될 것인가, 흉기가 될 것인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2.0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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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과학: 인간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은 어떻게 상호작용해왔는가 | 한헌수·임종권 지음 | 인문서원 | 584쪽

 

유사 이래 고대와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화와 문명의 전개 과정을 학제 간 융합의 관점에서 살핀 문명 비평서다. 인류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은 무엇인가? 단연 불과 도구의 사용으로부터 시작된 과학기술의 놀라운 성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생존 법칙에 순응하며 사는 동물과 달리 인류는 단지 생존에 멈추지 않고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그 결과 지구의 최상위 지배자가 된 데 이어 신의 영역을 넘보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제 과학은 우리를 어떤 미래로 이끌 것인가?

인문학자(임종권)와 공학자(한헌수)가 각기 다른 학문 분야의 시각에서 벗어나 융합의 관점에서 인류의 1만 년 역사를 개괄하고 나아가 현대 과학이 인류 역사를 더 발전시킬 것인지, 아니면 파괴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와 함께 저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돋을새김한 부분 중 하나는 서구 중심 문명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다. 동양 과학이 서양보다 뒤처졌다는 편견이 생긴 것은 동양 과학이 서양 과학과 다른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랍의 선진 문명이 어떻게 유럽으로 전파되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세히 밝힘으로써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한다. 

고대 인류가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우주와 자연의 법칙이었다. 해와 달 그리고 날씨, 식물의 생성과 성장 등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는 과학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그 표현 방식은 신화와 종교였다. 여기서 초월적이고 전능한 존재인 신이 등장했다. 고대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종교에서 출발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우주의 탄생에 관한 현대 과학의 설명은 고대의 신화와 종교에서 설명하는 바와 거의 유사하다.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이 과학을 만들어냈고, 역사는 이 과학 덕분에 진보해왔다.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인류가 수렵채집 시대에서 문명을 낳은 농경시대로 접어든 것에 대한 인류 역사의 설명에서 드러난다.

처음부터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은 서로 분리되어 인류 역사를 만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지식인들이 자연철학이라고 한 바와 같이 과학과 철학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상호 융합된 영역이었다. 중세 시대에도 유럽에서는 수도원이 학문 연구의 중심지였으며 우수한 인재들이 수도원과 교회에 모여들어 신학뿐 아니라 철학과 물리학, 천문학 등을 연구했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이를 입증한 갈릴레이와 케플러 등의 천재 과학자들은 모두 교회 사제였고 데카르트, 파스칼 등 근대 유럽의 철학자들 역시 과학자였다.

서양 역사가들은 흔히 비유럽 지역의 문명을 과소평가하고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동양 문명의 우월성을 폄훼, 축소하거나 심지어 왜곡해왔다. 과학혁명이 유럽에서 일어났다는 자부심으로 인류 문명사를 유럽에 맞춰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역사 인식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그러나 유럽이 근대 과학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양의 우수한 문명을 수용하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동양의 문화가 유럽에 전파되지 않았더라면 유럽은 지금도 동양에 비해 미개한 상태에 놓여 있을지 모른다.

15세기까지 중국은 자연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유럽보다 훨씬 발전한 선진국이었다. 유럽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보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수출한 것이 더 많았다. 자석나침반과 이를 이용한 항해술, 종이, 인쇄술, 도자기 그리고 화약이 그것이다. 사실상 동양의 문명이 미개한 유럽의 문명을 일깨워준 것이다. 유럽이 봉건제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와 근대화를 이룩한 것은 동양 문명과 문화의 덕택이었다.

동서 문화권 교류의 중심이었던 이슬람 문명의 역할 또한 지대했다. 이슬람이 지배한 지역들은 헬레니즘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전통이 깊이 뿌리내린 곳인 데다 동으로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주변의 여러 문화를 수용할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과학이 기독교의 영향으로 암흑에 싸여 있는 동안, 이슬람 세계는 그리스 과학과 자연철학을 받아들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등 뛰어난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업적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과학과 학문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와 투자 덕분이다.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왜 유럽보다 근대화가 늦었는가. 이는 지리적 환경과 사회체제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유럽은 토지가 척박하여 농작물은 물론 많은 물자가 충분히 생산되지 못했다. 거기다 유럽 인구가 증가하여 살기 위해서는 다른 부족과 국가를 약탈하거나 이슬람 세계 혹은 중국 등 동양과의 무역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충당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역이나 정복 전쟁을 끊임없이 하면서 바다와 육지로 멀리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지역은 필요한 모든 물자를 자급자족했기 때문에 그런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급자족 상태에서 굳이 먼 바다를 항해할 필요가 없으니 나침반을 이용한 해양 진출이 거의 없었고, 또 동양에서는 유럽처럼 국가들 간에 전쟁이 많지 않아서 화약을 이용한 총과 대포 등의 무기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종이와 인쇄술의 경우에는 지식의 지배층 독점 그리고 한자의 어려움이 지식 보급에 장애로 작용했다.

유럽대륙에서 르네상스, 종교개혁과 함께 과학기술의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때부터 동양과 서양의 기술력이 크게 차이 나기 시작했다. 서양에서는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기초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나 중국에서는 응용되지 않는 기초과학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으로 인해 기술 축적이 어려웠다. 특히 명나라가 마음의 수양이 학문 연구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주자학을 관학으로 삼고 쇄국정책을 시행한 것이 과학기술 퇴보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한편 아랍 세계도 16세기까지는 페르시아의 정치, 그리스의 철학,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중국과 인도의 기술, 문화가 융합되면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루었으나 종교 원리주의가 득세하면서 더 이상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고대부터 철학과 인문학에서 시작하고 발전해온 과학은 근대에 들어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다윈의 진화론, 마르크스의 유물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등이 등장한 19세기는 유럽에서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기독교적 인간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인간상이 정립된 시기였다. 과학혁명을 기반으로 한 산업혁명은 사람들에게 인류 문명이 무한 진보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신의 전능함을 인간도 갖고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성스러운 정신보다 세속적인 물질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물리학은 인류에게 컴퓨터, 인터넷, 태양전지, 달 착륙, 핵무기, 게놈의 해독, 빅뱅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제공하면서 인간 삶의 근본을 바꾸어놓았다. 이제 인류 역사의 주체는 절대적 존재인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인간은 ‘초인’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과학을 통해 신의 초월적 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계몽시대 이후 인간은 이성의 빛을 신봉하며 신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물질문명의 발달에 온 힘을 쏟으며 인간 능력을 신의 전능함과 비견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이후로 인간은 회의론에 빠져 근대성을 비판하며 새로운 삶의 희망을 이성이 아니라 실존에서 찾으려 했다. 산업사회가 파괴한 인간성 회복만이 인간의 미래를 보장한다는 신념은 탈근대성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낳았다. 이제 과학이 역사의 주인인가, 아니면 역사가 과학을 지배할 수 있는가.

그 결과가 인류의 멸망이든 혹은 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든 현대 과학은 끊임없이 진전할 것이며 인류 역사는 그 흐름 속에서 무한히 변천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역사의 진보와 퇴보는 인간이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과학의 시초가 그러했듯이 인문학적 통찰에 기반한 시대정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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