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대학의 주인? 몇 가지 주요 개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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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대학의 주인? 몇 가지 주요 개념에 대하여
  • 윤혜준 연세대·영문학
  • 승인 2023.01.2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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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올해 입시에서 급격한 인구감소로 인해 정원을 채우기 힘들 것으로 예상되는 대학들이 지방에서 다수 생겨날 것이라는 언론 보도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정치권에서는 불가피하게 발생할 폐교를 위해 퇴로를 열어주기 위해 설립자들의 재산권을 보상해주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대학’이 재산인가? 이러한 보도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물을 법한 질문이다. 거기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문학자인 필자는 ‘대학’이라는 말의 연원을 되새겨 본다. 영어나 기타 유럽어로 이 말을 되돌려놓으면 모두 라틴어 ‘universitas’가 그 어원이다. 유럽에서 대학이 생겨나던 12~13세기에 이 말은 ‘자치 길드’를 뜻했다. 다만 이 길드는 특정 숙련 기술(artes)을 공유하는 업자들의 조직이 아니라, 생계에 직결되지 않는 ‘자유로운 기술’(artes liberales)을 전수하는 ‘선생과 학생의 자율길드’(universitas magistorum et scholarium)였다. 이렇듯 특이한 길드의 구성원들은 여러 지역에서 온 외지인들이었기에, 함께 거주할 시설이 필요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세워진 기숙사 겸 교육용 건물들을 함께 사용하는 단체들은 ‘collegium’(‘같은 법/규정을 지키는 공동체’)으로 불렸다. 이러한 공동체에는 당연히 개인 ‘주인’이 없었다. 다만 고마운 기부자는 필요했다. 파리의 유명한 ‘소르본 대학’은 이 기숙교육 공동체를 설립할 기부금을 낸 사제 겸 신학자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을 기념하는 이름이다. 오늘날 세계 최고 대학인 미국의 하버드는 영국에서 건너온 성직자 존 하버드(John Harvard)의 이름을 사용한다. 그는 서른을 다 못 채우고 죽었으나 유언을 통해 기부한 기금과 장서가 이 대학의 씨앗이 되었다. ‘주인’은 없고 ‘기부자’는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 대학의 본 모습이었다.
 
대학이 태어날 때의 이름인 ‘universitas’나 ‘collegium’이 ‘자율공동체’를 뜻하기에 특정 개인이나 가문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사립대학’이라는 말을 버젓이 사용한다. 식민지 시절 일본 고등교육법의 잔재인 이 말은 주인이 없어야 할 대학을 마치 사사로운 개인 재산인 것으로 오해할 길을 열어놓았다. 서구 제도를 수용하되 서구 정신은 일본식으로 적당히 왜곡해도 좋다는 ‘화혼양재론(和魂洋材論)의 전형적인 예이다. 모름지기 대학은 원래 모두 ‘사립대학’이었지 중앙정부가 세우고 관리하는 ‘국립대학’은 아니었다. 국가가 세운 고등교육기관들이 18세기부터 유럽 국가들에 등장하기는 했으나, 오늘날 세계대학랭킹의 상위권을 차지하는 선두주자들은 영미권의 ‘사립대학’들이다.

‘사립대학’의 운영 주체를 ‘이사회’로 지칭하는 것도 문제의 소지가 많다. 이들은 영리목적 법인의 지분을 소유한 채 경영책임을 공유하는 ‘등기이사’들이 아니다. 대학의 ‘이사’들은 이러한 제도가 생겨난 영미의 법 개념에 의하면 ‘신탁관리자’(trustees)들일 뿐이다. 신탁관리자는 ‘신탁된 자산’(trust)을 ‘위탁자’(trustor)의 뜻에 따라 ‘수혜자’(beneficiaries)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책임을 진다. 개인 재산의 경우, 미성년 상속자가 이러한 ‘신탁’의 수혜자들이다. 교육기관의 경우, 그 수혜자들은 해당 기관의 구성원들이다. 신탁관리자가 수혜자가 아니라 본인의 이득을 위해 신탁된 자산을 운영하는 것은 위탁자의 뜻을 어기는 위법행위가 된다. ‘설립자’ 즉 기부자 또는 그의 후손이 신탁관리자의 역할을 겸할 경우에도 이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인구팽창 시기에 사립대학을 세워서 본인 및 가문의 부를 이룩한 사례들이 제법 많다. 필자가 처음으로 재직했던 서울 시내 한 대학도 그러한 경우였다. 그곳에서 ‘설립자’의 아들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학교 부지를 매각해 캠퍼스를 경기도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 대학이 있던 자리는 오늘날 집값이 엄청나게 비싼 고급 아파트 단지로 변신했다.

대한민국에 그토록 많은 사립대학들이 생겨난 이유가 소르봉이나 하버드 같은 고매하고 거룩한 기부자들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필자의 첫 직장의 사례처럼 대학 운영을 통해 가문을 세우려는 야심가들이 많아서일까? 만약 전자라면 대학이 폐교될 위험에 처했다면 다른 선한 목적으로 해당 자산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애초에 사적인 이득 추구가 아니라 ‘수혜자’들을 위한 기부였다면, ‘재산권’이 어찌 문제가 되리요? 반면에 후자라면 이들이 애초에 어떻게 신탁된 자산이어야 할 대학을 운영하며 최초 기부 시점보다 더 많은 사유재산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는지부터 검증해야 할 것이다. 수혜자들에게 갈 몫을 차곡차곡 챙겨오지는 않았나? 사실상 영리단체처럼 대학을 운영해오지는 않았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떳떳하게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음에도 대학을 폐교해야 할 경우에만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진정으로 수혜자인 학생들을 위해 아낌없이 기부하고 헌신한 대학 재단들은 폐교의 지경에 이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윤혜준 연세대·영문학

연세대학교 문과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영문학 박사.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장, 언더우드특훈교수 역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런던 대학교, 서섹스 대학교 방문학자, 이탈리아 피렌체 대학 초빙교수 역임. 전공 관련 단독 해외출판 저서로는 The Rhetoric of Tenses in Adam Smith’s “The Wealth of Nations”, Metropolis and Experience: Defoe, Dickens, Joyce, Physiognomy of Capital in Charles Dickens: An Essay in Dialectical Criticism이 있다. 이 글과 관련된 연구실적으로는 「자율공동체로서 서구대학의 역사와 조선기독대학(연희전문학교)」 (『인문과학』, 2020)과 공저 『해방 후 연세학풍의 전개와 신학문 개척』(2015), 『일제 하 연세학풍과 민족교육』(2015), 『남북분단 속의 연세학문』(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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