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서구철학 전체에 반기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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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 서구철학 전체에 반기를 들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1.2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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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와 미래 사이: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연습 | 한나 아렌트 지음 | 서유경 옮김 | 한길사 | 516쪽

 

역사·전통·권위·자유 등의 전통적인 정치 개념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사유가 담긴 여덟 편의 철학 에세이 모음집이다. 한나 아렌트 탄생 100주년 펭귄 기념판으로 약 20년 만에 복간되면서 아렌트 제자 제롬 콘의 서문과 2023년에 발맞춘 옮긴이의 해제와 후기가 추가되었다. 

이 책은 ‘전체주의’ ‘사유’ ‘행위’ ‘상투어’ ‘탄생성’ ‘다수성’ 등 아렌트 정치사상의 핵심 용어를 상세하고도 집약적으로 설명한다. ‘아렌트 개념어 사전’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아렌트 사상에 대한 정확한 지침이자 그의 사상의 발전을 예견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나아가 서구철학의 이분법에 대한 아렌트의 해체주의적 연구 방법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저작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플라톤에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는 이분법적 서구철학 전체에 대한 통렬한 해체주의적 비판을 통해 세계를 독해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거나 지워진 개념들을 발굴해 새로운 현재의 용도를 발명해낸다.

역사와 전통, 권위와 자유 등 전통적인 정치 개념에 대한 논의 속에서 아렌트는 인간실존의 존재론적 이분법을 문제 삼는다. 즉, 그동안 분리되어온 다수 인간의 ‘정치적 삶’과 단독자 인간의 ‘철학적 삶’의 불가분의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아렌트에게 인간실존은 ‘철학적 삶’이 나타내는 사유와 ‘정치적 삶’이 나타내는 다수성의 복합체였다. 아렌트가 단독자로서의 인간만을 다루는 철학자로 불리길 스스로 거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렌트가 말하는 인간다운 삶, 그것은 ‘각자’의 정신 안에서 ‘서로’를 전제하고 ‘행위’하는 삶이다.

왜 책 제목이 ‘과거와 미래 사이’인가. 스스로 정치사상가임을 자처한 아렌트이기에 ‘과거’와 ‘미래’라는 형이상학적 시간 개념은 언뜻 어색한 주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제목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사이’다. 과거와 미래의 사이, 즉 ‘현재’에 대한 이야기 속에 이 책의 핵심이 들어 있다. 인간은 ‘현재’를 인식하는 유일한 존재다. 플로티누스는 “과거는 지금 끝나는 시간이고, 미래는 지금 시작하는 시간”(18쪽)이라는 표현을 통해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으로서 ‘지금’을 말했다. 즉 통일체 또는 연속체로 인식될 수 있는 시간에 하나의 지점, 즉 ‘공간’을 만들어내며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하나의 공간으로서 ‘현재’는 이제 물리적으로 점유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위치가 된다.

이로써 인간은 현재를 인식해 세계에 자신의 ‘좌표’를 찍는다. 좌표 찍기는 그 사람이 태어날 때 시작되고, 죽을 때 종결된다. 이 ‘역사적 과정’은 철저하게 개인화된 여정으로 교환가치로 평가받을 수 없는 “독특한 비매품”이다. 인간은 자신을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틈입시키면서 자신의 현재를 창조하고 확장해간다. 이 과정이 사유이며, 인간실존의 조건이다. 즉, 인간의 실존과 시간의 발생은 동시다발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인간의 틈입으로 현재가 시작되는 순간, 즉 탄생(태어남)의 순간은 곧 한 인간실존의 시작이기도 하다. 무수히 태어나는 다수의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자신만의 좌표 찍기를 ‘시작’하게 된다. 일차적인 생물학적 탄생 이후에도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이차적 탄생, 즉 ‘정치적 탄생성’(political natality)을 갖는다.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이 새로운 시작(선택)의 능력, 즉 행위 능력 또한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아렌트의 실존에 사유와 행위가 분리될 수 없는 이유다.

모든 개별 인간은 아렌트의 이러한 인간실존적 조건들, 즉 최초의 탄생에서 비롯된 행위와 사유의 능력을 갖는다. 모든 행위는 새로운 시작을 내포하므로 무수한 예측 불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사유는 무수한 변수들 ‘사이’를 또다시 부유하고 횡단한다. 각자의 좌표를 찍어가는 이곳에 ‘절대적 진실’이 없음은 당연하다. 아렌트에게 인간사의 영역은 다양한 ‘상대적 진실들’로 넘쳐나는 공간이며 이 영역의 본질은 ‘증명’이 아닌 ‘설득’에 있다.

넘쳐나는 ‘상대적 진실들’ 사이에서 불멸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바로 ‘기억과 전승’에 있다. 아렌트가 여덟 편의 에세이에서 말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전승할 것인가. 인간의 사명이란 바로 끊임없이 탄생하는 개별 인간에게 회자되고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공통의 세계, 공통의 기억을 ‘창조’하는 것이다. 서로를 전제한 우리 각자가 모여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그렇게 ‘과거와 미래 사이’에 공통의 좌표를 찍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의 창조자인 동시에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호모 데우스’(Homo Deus), 그는 바로 공론장의 ‘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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