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즈와 북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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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즈와 북 호텔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3.01.28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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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 김영명 교수의 〈생활에세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란 소설이 하도 유명하고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라고 하길래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서 한 번 읽어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읽기 어려웠다. 더블린 사람들의 하루 일상들을 묘사한 것인데, 뭐가 뭔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페이지로 700 페이지인가 그 이상인가 하여 결국 읽다가 포기했다. 뭐가 뭔지는 잘 몰라도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머리에 남는다. 대체로 보면 독자들이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책이 문학이나 철학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칭송받는 것 같다. 쉽고 간명한 책이 최고로 칭송받는 경우는 별로 못 봤다. 대중성과 예술성의 괴리일 수도 있겠다. ‘율리시즈’는 호머의 ‘일리어드’의 형식을 차용하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소설의 역사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한다. 그런 점이 전문가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것 같다.

같은 시기에 외젠 다비라는 사람은 ‘북 호텔’이란 소설을 썼다. ‘율리시즈’와는 달리 매우 대중적이고 읽기 쉬운 소설이다. 북 호텔에 드나드는 더블린 서민들을 묘사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독자에게 잘 알려준다. 다비는 당시 유행하던 의식의 흐름 기법을 비판했다고 한다.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율리시즈’는 엘리트적이고 ‘북 호텔’은 대중적이다. 전문적인 비평가들은 ‘율리시즈’를 높이 평가하고 일반 대중은 ‘북 호텔’을 더 편하게 느낄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타려면 어렵게 쓰고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면 쉽게 써라. 그런데 이 또한 꼭 맞지 않는 것이, 노벨 문학상을 타면 그 소설도 베스트셀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바늘 구멍을 통과하기는 어려우므로 그냥 대중적으로 쓰는 것이 낫겠다. 책을 팔려면 말이다. 

소설이든 뭐든 꼭 어때야 한다는 주장은 우습다. 의식의 흐름으로 써야 한다는 둥 사실적으로 써야 한다는 둥 한 가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다 자기 취향이나 가치관에 달린 문제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의식의 흐름 수법을 가진 자의 장난쯤으로 취급할 것이고, 부르주아 엘리트들은 민중 소설을 천박하다고 느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건 자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무시하거나 비하하거나 심지어 억압해서는 안 된다. 

소설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다른 대부분의 문화 영역에서 마찬가지이다. 사실주의 그림만이 진정한 그림이라는 둥 아니면 거꾸로 추상이 아니면 안 된다는 둥 이런 주장들은 우습기 짝이 없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팝아트가 탄생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내 말의 대부분은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 맞을 것이다) 도대체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자기가 싫으면 안 하고 다른 거 하면 될 일이지. 혹시 추상표현주의가 권력이 되어 다른 유파들을 억압하고 부와 명성을 독점한다면 그 사실에는 반발할 여지뿐 아니라 필요도 있겠지만 추상표현주의 자체에는 반발할 필요가 없다.  

현대 미술의 문을 연 인상주의는 당시까지 서양 미술계를 지배하던 관학 미술에 ‘반발’하여 느낀 대로의 빛의 인상을 주로 그렸다. 이것은 새로운 미술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이 경우는 과거의 인습이 빛을 잃고 새로운 사조가 대신하는 경우였지만, 그것은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서서히 이루어진 일이었다. 엘리트와 대중 모두가 관학 미술보다 새로운 사조를 진정으로 가치 있는 미술로 인정하면서였다. 이런 식으로 어떤 사조나 방법이나 주제나 대상이 지배적이 될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정리된다. 물론 그 사이에 권력 투쟁은 일어난다.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시간이 더 지나 인상주의 이전의 관학 미술이, 변형을 통하여, 다시 힘을 얻는 일이 오지 않으리라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깊이 알지 못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요지는, 소설이든 미술이든 철학이든 음악이든, 어떤 한 분야, 어떤 한 방식, 어떤 한 주제가 ‘옳고’ 다른 것들은 ‘그른’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모두 개개인의 취향과 가치관 문제이다. 그 사이에 권력과 부의 다툼이 끼어드는 것이 각 종류들 사이에 생기는 우위 다툼의 근본 원인이라 본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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