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즐거운 기회 -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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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즐거운 기회 -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에 대하여
  • 고운기 한양대교수·시인
  • 승인 2023.01.28 2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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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가 바뀐 자리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가 우리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지난 민주화 운동 시절이었다. 김광규가 번역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주는 뉘앙스가 그랬거니와, 투사였던 김남주가 브레히트의 시에 깊이 빠졌던 일 때문에 그랬다. 김남주가 옮겨 펴낸 시집이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였다. 그 표제시가 특이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첫 연의 석 줄은 평이하다. 그런데 두 번째 연에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가 주는 충격이 컸다. 빗방울에 살해되다니, 그것은 도저히 용납 못할 이유로 당했던 그 시절의 많은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신형철 교수의 최근작 《인생의 역사》에서 이 시를 해석한 부분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한다. 시 속의 화자인 ‘나’는 그동안 알았던 브레히트가 아니다. 동지이자 연인인 루트 베를라우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람’이, 독일어 원문으로 확인하는 바, 남성 명사 곧 남자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베를라우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베를라우가 사랑한 남자 브레히트이다. 그 남자가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주는 상처의 뒤

화자의 신원이 달라져서 뭐가 중요한가? 신형철은 말한다.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어 보내면 ‘당신이 필요해요’라는 답장을 받게 되던 한 사람” 때문에 “쓸쓸하다”고. 브레히트가 연인에게 한 말은 고작 ‘필요하다’였고, 시 속에 별 의식 없이 화자만 바꿔 놓았는데, 신형철은 그것이 얼마나 무심한 일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

상호의존적인 약점이 있을 때 사랑은 성립된다.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상대가 필요한 사람은 대등하게 약하지 않다. 전자는 내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지만, 후자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것이다.(21-22면)

한마디로 기울어진 관계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필요하다는 사람을 위해 빗방울에 맞아 죽어도 안 된다. 극진하지만 정상은 아니다. 정상이 아닌 이런 관계는 일찍이 에리히 프롬이 했던 말의 변주처럼 들린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황문수 옮김, 《사랑의 기술》, 62면) 

그러나 여기서 정상이니 성숙이니, 도덕적인 품평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신형철이 시를 읽어내는 맥락에 매력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진실이 주는 상처’를 찾아내고 나서, 그럼에도 그런 비대칭적인 관계가 통하는 경우,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이 관계가 당연하다. 사랑은 참 다양하다. 
 
신형철이 읽은 브레히트를 길게 내세운 까닭이 있다. 시 읽기가 쓰기 위에 덧입혀져 도리어 더 어려워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난해하거나 미숙하게 쓴 시인의 책임도 있지만, 대체로 읽는 이가 적실한 이해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형철은 바로 읽기의 미덕을 지닌 평론가이다. 갑자기 시 읽기가 즐거워진다. 


변증의 틀에 능숙한 설명 

무엇보다 대구(對句)가 지닌 비밀, 대조(對照)가 담은 맥락을 참 잘 풀고 짚는 것 같다. 우리 옛 시 〈공무도하가〉의 첫 두 줄인 ‘공무도하(公無渡河) 공경도하(公竟渡河)’에서 ‘무’는 ‘없음이 아니라 없어야 함’이라고 본 것이 그렇다. 그러므로 ‘경’이 ‘어떤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는 사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간절한 ‘무’를 냉혹한 ‘경’이 무너뜨리는 구조”(34면)라는 설명은 얼마나 적실한가. ‘무’와 ‘경’의 대구를 대조적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아마도 변증의 틀을 갖춘 데서 시작한 것 같다. “인간이 더는 못 살겠는 때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살 ‘방법’이 없거나(불가능), 살 ‘이유’가 없거나(무의미).”(94면) 같은 설명은 사유 방식이 두 기둥으로 벌려 제3의 뜻을 향해 가는 틀에서 나온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다음인 것 같다.

여럿이 마시는 사람은 희망이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이고, 혼자 마시는 사람은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일까. 전자가 결국 절망뿐임을 깨달으면 귀가하다 혼자서 한잔 더 할 것이고, 후자가 끝내 희망을 포기 못하겠으면 누군가를 불러내 한잔 더 할 것이다.(226면) 

‘여럿이 마시는 사람’과 ‘혼자 마시는 사람’으로 벌려놓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그렇게 역할을 나눈 그들이 소중과 정직을 번갈아 맛본다. 절묘한 짜임 아닌가. 그래서 그들이 만들 제3의 세상을 나는 기껍게 기다리게 된다.    
 

고운기 한양대교수·시인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전공은 한국고전문학. 연세대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인). 일본 게이오대 방문연구원, 메이지대 객원교수 역임. 주요저서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삼국유사의 재구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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