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미신인가, 상징의 미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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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미신인가, 상징의 미학인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1.2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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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적의 비밀: 기원과 상징의 문화 | 자현 지음 | 김재일 그림 | 모과나무 | 300쪽

 

우리 사회에서 부적은 ‘낡은 미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이런 단정이 옳을까. 그림을 통해 염원을 표출하고, 상징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은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부터 현대 교통 표지판 및 로고에 이르기까지 인류와 함께해온 유구한 문화다. 특히 그림을 통한 상징 표현은 동아시아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 책은 오랜 세월 우리가 관습에 따라 부정적으로만 치부하던 부적이 ‘상징의 미학’으로서 얼마나 영향력 있는 콘텐츠로 발전할 수 있는지 다양한 사료와 도판 자료를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 자현 스님은 무엇보다 문화 파급력의 차원에서 부적이라는 코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지금 왜 우리의 시대적 과제인지를 일깨워준다.

동아시아 부적 문화의 최고봉이 ‘태극기’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까? 마찬가지로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24절기 가운데 입춘날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글귀를 붙이는 세시풍속 역시 오랜 부적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렇듯 우리가 평소에 잘 의식하지 못할 뿐 우리 삶 곳곳에는 부적 문화가 보편적 가치로 두루 녹아 있다. 이 책은 인간의 행복 추구와 삿된 기운을 막고 싶어 하는 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이 각종 생활 도구와 의복, 건축, 문헌, 그림, 풍습, 종교 등 문화사 전반에서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하나씩 밝혀나간다.

그동안 주술의 상징이라고 무조건 폄하해온 우리의 부적 문화에 대해 거부감부터 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민속신앙과 미신이 지배적이던 시대에 부적 문화가 자리 잡다 보니 주술성 짙은 부적(종이)의 형태만 부각되고, 그 안에 깃든 상징성은 철저히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부적을 음에서 양으로 끌어내는 작업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낡은 생각들을 뒤집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준다.

부적에는 유독 ‘왕(王)’ 자와 ‘일(日)’ 자가 많이 쓰인다. 이는 왕조 국가에서 절대적 군주권을 의미하는 권위와 나쁜 기운을 혁파하는 태양의 밝은 기운을 통해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다. 이런 이유로 승리를 기원하는 부적에는 ‘임금 왕’ 자가,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부적에는 ‘날 일’ 자가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부적의 글씨는 왜 붉은색일까?

『동의보감』에 따르면 부적을 쓰는 재료인 주사(朱砂)는 “불의 성질을 띠어서 색이 붉으므로 심(心)에 들어가 마음과 정신을 조절한다”고 쓰여 있다. 또 “정신을 기르고 혼백을 편안하게 하는데, 오래 복용하면 천지신명과 통한다”라고도 한다. 우리가 과학적 의서라고 여겨온 『동의보감』에 이런 주술적인 내용이 쓰여 있는 게 놀라울 따름이지만, 실제로 주사의 성분에는 마음과 정신을 진정시키는 효능이 있을뿐더러 과거에는 부적을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먹는 일이 흔했기에 한의학에 이런 내용이 수록된 것일 테다.

이런 주사의 효능은 곧 부적의 영험함으로 연결돼, 오늘날 형식만 다를 뿐 운동선수들이 중요한 경기날 붉은 속옷을 입는 것도 이와 무방하지 않다. 즉 붉은색이 좋은 기운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의 상징으로서, 붉은 속옷은 부적의 다른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부적에서나 볼 법한 내용들, 이를테면 귀신을 보는 방법인 ‘견귀방(見鬼方)’, 남성 태아를 여성 태아로 바꾸는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 아이를 빨리 낳는 ‘최생부(催生府)’ 같은 처방이 부적책이 아닌 동아시아 최고의 의서이자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동의보감』에 수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동의보감』에서 다루는 의학의 범주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한의학보다 연원이 오래된 부적 역시 인간의 모든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당대의 고민과 생활상을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로서 시대를 읽는 코드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시각에서 부적을 바라본다면 부적의 효능이 얼마나 허황한지를 논하기에 앞서, 그 옛날 부적에라도 의지해야 했던 사람들의 애환과 설움을 먼저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부적이 문화를 읽는 코드로 시대를 반영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예컨대 애플(Apple)사의 로고인 ‘한 입 베어 문 사과’ 모양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마력의 상징이며, 스타벅스의 로고는 ‘사이렌’이라는 정령을 차용해 대중들을 커피의 매력에 빠지게 한다는 점에서 현대판 주술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현실에 기반한 상징과 간략화한 추상적 기호를 통해 신비한 에너지를 끌어내는 방식은 분명 부적과 직결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예부터 악귀를 물리치는 부적으로 사용되어온 우리나라 벽사계의 신화 ‘처용’은 오늘날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 기원이 천년이 넘은 처용 설화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처용무’를 비롯해 ‘처용가’와 ‘처용도’가 발생한 배경이 되지만, 우리에게는 교과서에서나 봤음 직한 이야기에 그칠 뿐이다. 이 책은, 부적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신화와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준다. 나아가 한국의 옛 문헌과 예술작품들 곳곳에 부적이 사용되어온 방식을 통해서, 그리고 동아시아 전통과 그림 문화, 종교적 세계관을 통해서 인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부적이 문화사적으로 얼마나 매력적인 아이템인지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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