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자유의 개념과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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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유의 개념과 자유주의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01.14 0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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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33강_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에서 자유의 개념과 자유주의」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다섯 번째 섹션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제33강 최장집 명예교수(고려대 정치외교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한국에서 자유의 개념과 자유주의


최장집 교수는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은 아니나 “아주 빈약한 상태로”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의 자유주의를 논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여러 결핍된 조건들을 깊이 이해하고, 개선해나가는 데” 자유주의가 “매우 강한 유의미성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인데 그를 위해 “자유주의의 관점 내지 문제 제기가 기여할 수 있는 지점들에 주목”할 것을 말한다. 본격적인 논의의 틀로 먼저 “자유주의의 한국적 수용과 그 취약성의 기원”을 살펴본 다음, “자유주의의 네 가지 문제 영역”으로서 보편적 인권 사상, 권력 분립을 통한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현실주의적 정치, 자율적 시장경제가 무엇인지 심도 있게 들여다본다. 이어서 그 네 개의 문제 영역에 비추어 “자유주의와 한국 민주주의”의 상황이 어떠한지 되돌아보고, 최근 “한국 자유주의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조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구체적 연구 사례를 들어 검토한다. 그러면서 비록 “역사의 과정에서 실패가 아니라면 취약했다 하더라도 중심을 만들기, 또는 균형자를 만들기”가 “자유주의와 자유의 역할”이 아닐까라며 “한국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자유주의의 지적, 문화적 사회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지난해 12월 10일, 최장집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3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들어가는 말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의 위치는 애매하다. 민주화 이후의 자유주의는 민주화 이전의 자유주의와 어떤 다른 점을 갖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제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는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은 아니라면, 아주 빈약한 상태로 보인다. 필자는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에 의해 포착 가능한 한국 사회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여러 결핍된 조건들을 깊이 이해하고, 개선해나가는 데 있어서 자유주의는 매우 강한 유의미성을 지닌다. 

1. 자유주의의 한국적 수용과 그 취약성의 기원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해방 후 민족 문제를 둘러싼 극심한 이념적 갈등이라는 환경하에서 분단국가가 건설됐을 때, 체제와 제도 건설을 뒷받침하는 공식 이념으로 민주주의와 함께 수용되었다. 민주주의가 이념이라기보다 정치 체제로서 보편성을 가지고 수용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의 수식어가 되는 자유주의는 사실상 냉전반공주의를 의미하면서 이념 갈등의 중심 요소로서 자기 위상을 가졌다. 한국 사회에서 이념이 냉전과 분단을 직접 가져온 것은 아니다. 역으로 냉전과 분단이 이념 갈등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통해 현상을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고, 강화시켰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냉전하에서 한국 자유주의는 곧 급진적인 냉전자유주의를 의미했고, 그렇게 실천되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데 있어 하나의 비극이었다. 보수파들은 실제로 자유주의의 가치와 이념을 수용하고 실천하기보다 이를 반공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했고, 그에 반해 진보파들은 그것이 사실상 냉전반공주의를 의미했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고, 배척했다. 필자가 언젠가 “한국의 자유주의는 진보에 의해 부정되고, 보수에 의해 왜곡되고, 버림받았다”고 말했을 때 이런 의미를 두고 했던 말이다.

그러나 냉전의 극성기를 지나면서 1960-70년대 산업화 이후 좌우 양자는 모두 민족주의 이념으로 수렴됐는데, 그것은 국가 중심적 산업화와 경제 성장/발전과 잘 조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는 국가 중심성, 경제적 민족주의로 귀결되고, 방법과 접근은 다르지만 좌우 모두 통일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수렴되기에 이르렀다. 민중 운동이 마르크시즘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만다린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지식인 엘리트주의는 민중 운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해방적 상상력을 찾았지만, 사실상 민족국가, 자본주의의 성장 정책이라는 동일한 이념적 기반 내에서 움직여왔다.

이런 이념적 태도 내지 정향이 자유주의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는 자유주의에 의해 뒷받침되지도 않았고, 그것을 동반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후 정부들은 경제 발전이라는 집단적 목표를 추구했다. 즉 한국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우회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개인의 윤리적 가치와 사회적 구조에 있어서는, 한편으로는 전통적, 위계적, 집단주의적 윤리와 가치가 상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경제 발전, 후기 산업화 사회의 특성으로서 전통적 사회관계의 해체에 따른 개인주의적 파편화가 공존하는 혼란 또는 아노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2. 자유주의의 네 가지 문제 영역

1) 보편적인 인권 사상
2) 권력 분립을 통한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
3)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현실주의적 정치관
4) 자유주의와 자율적 시장경제

3. 자유주의와 한국 민주주의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생각할 때, 자유주의 위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화 이후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조건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유주의가 민주화의 기초가 되지 못하고, 민주화가 자유주의를 정치 현실로 불러올 필요를 느끼게 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건국 이후 “자유민주주의”는 국가 건설의 존재 이유로 나타났지만, 민주주의가 정치적 실천을 통해 보편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과는 달리, 자유주의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자유주의의 중심적 가치들이 상당 정도 민주주의의 가치와 이념 속으로 포괄되는 동안에도 자유주의가 정치적 이념으로서 중심적인 위상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과부하 걸리게 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민주화가 자유주의적 계기를 가져왔느냐 하는 문제 또한 그렇지 못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민주화 과정에서 독재 권력을 타도하는 정치적 목표를 넘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구현으로서 얼마나 자유주의적 가치와 원리의 중요성을 일깨웠는가에 대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민주화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가치가 얼마나 큰 열정과 감동, 내면적 울림을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도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 그러한가?

한국에서의 민주화는 정치 체제를 민주화하는 정치적 투쟁이 강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원리들은 민주주의 투쟁의 결과로 획득되기 이전에 이미 헌법 조문을 통해 명문화돼 있었다. 법의 실제가 아닌 형식에서 정치 체제가 실제로 민주주의냐 아니냐, 실제로 자유주의의 원리가 실천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게 한국은 처음부터 민주주의였고, 자유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실제의 자유주의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1) 보편적인 인권 사상

17세기 영국과 20세기 후반의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그 핵심 내용으로서 보편적인 인권들은 현실의 정치 체제나 법의 체계에 선행해서 또는 그 상위에 존재하는 자연법에 의해 주창되고 실효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민주주의의 실천에 의존적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헌법 조문으로 존재했던 정치적 자유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인권들에 관해 법의 실제적 효능을 크게 확대하는 계기를 가졌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이념과 가치들이 현실의 정치 체제나 권력으로부터 독자적으로 활용되면서 시민들의 내면적 가치로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사회에 뿌리내렸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과거 권위주의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 이후에도 시민적 기본권들이 위협되는 현상들은 흔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은 여전히 권력에 의해 또는 그 문제의 가치와 규범을 인지하지 않는 입법화를 통해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다. 민주주의하에서도 국가의 목표와 의사가 개개 시민의 자유 위에 군림하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자유는 위험하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과 다수 지배의 원리에 의해 집합적 결정이 가능하고, 그것이 법으로 구현된다. 그에 비해 자유주의는 기본권이라는 내용을 통해 모든 개인에 평등하게 인신, 양심과 종교, 안전, 재산 소유 등에 대한 권리를 부여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는 법적, 형식적 자유의 보장을 통해 구현되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불평등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크든 적든 다수결의 원리를 통해 침해할 수 없는 독자적인 영역이 존재한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에 비해 진보적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기반을 갖지 않는 한국적 조건에서 민주주의는 법적, 절차적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권을 구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질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권위주의적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공권력 내지 강권력에 의한 개인 자유 침해의 그 대상이 기존의 지배적 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거나 사회적 소수자들이거나 사회경제적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파들에 비해 진보파들이 민주주의의 원리와 가치를 구현하는 데 더 열성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수호함에 있어 자유주의의 가치의 맥락에서 진보파들이 그런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율성, 개인의 기본권은 국가와 공동체의 틀 안에서, 그리고 한 사회에 군림하는 지배적인 목표, 가치관이나 합의를 통해서 만들어진 어떤 집단적 가치에 우선한다는 관념과 문화, 사회적 가치가 자리 잡을 때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할 때 진보파들이 얼마나 이런 이념과 가치, 정치사회관을 수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2)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의 자유주의

한국의 민주화는 강력한 국가 권력에 저항했던 운동에 의한 민주화로 특징된다. 운동이 수반했던 엄청난 열정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은 특정의 민주주의관을 발전시키는 데 모태가 되었다. 구질서(ancien régime)가 존중하고 실현하지 않았던 것은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자유주의도 그러했다. 민주주의를 추동했던 중심적인 사회 세력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것은 민주주의였고,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는 이렇다 할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의 민주주의와 민주화가 자유주의의 기반 없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게 된 사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운동을 이념적으로 주도했던 민중주의는 민주주의와 (혁명적/급진적) 민족주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민주주의관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범위를 훨씬 넘어, 관념화되고 추상화된 어떤 이상주의적 체제로 이해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적인 공동체란 진보적이고, 올바른 이론과 그 기획에 의해 일거에 성취될 수 있다고 믿는 진보적 엘리트들 사이에서 정서적 급진주의를 동반했다. 이런 급진주의가 수반하는 정치관은 현실에 천착하는 행동 양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정치적 실천이 현실로부터 괴리되는 경향을 드러냈다. 우리가 자유주의의 냉정한 현실주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이 지점에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한국 민주주의 현실은 무엇보다도 2010년대를 전후로 하여 정당의 퇴행과 저발전과 병행했던 진보, 보수 간 정치적 양극화, 사회 공론장의 수준의 저질화와 병행하여 언론이 공적 역할을 상실한 데서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변혁적 운동론에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내용에 있어서도 반자본주의적 생산 체제, 사회주의가 이념적 준거로서 진지하게 제시된다.

변혁적 사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권력과 갈등을 중심으로 한 정치 현상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데 있다. 자유주의의 현실주의적 정치철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으로서의 실천이성은, 정치 현실은 인과관계의 설정과 예측이 이성적으로 파악되기 어렵다는 사실로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치 현실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 분별 있는 판단과 권력을 사용하는 정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 의식을 그것의 중심 요소로 포괄한다. 오늘의 한국적 정치 조건, 정치 문화에서 자유주의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가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상정되는 이상과 목표를 과도하게 높게 설정하면서, 정치를 뛰어넘어 이를 일거에 해결코자 하는 경향성에 대한 어떤 해독제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신념을 갖는 정치의 행위자들은, 과도한 열정을 차가운 열정으로 전환하고, 현실 문제의 복합적 구조를 이해하고,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증진하는 방법을 자유주의로부터 배워야 할 일이다.

 

3)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와의 관계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자유주의 내지 시장경제와 관련해 자유주의가 이해되는 방식은,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주의와 동일한 것이거나 다른 종류의 이념이라 하더라도 양자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자주 착시 현상이라 할까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그로 인해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로 인식되는 동안, 진보파들은 반자유주의자로 인식된다. 한국의 진보파들은 그들이 진보적일수록 넓게는 시장경제에 대해 좁게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를 수용하지 않거나 이에 비판적이다.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사상이고 이념이고 교리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의 보수파들은 경제적 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자일 수는 있어도 자유주의자는 아니다. 동시에 경제적 진보파들은 경제적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자는 아닐지 몰라도 자유주의자일 수는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진보파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간의 관계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유주의가 시장경제에 있어 넓은 가능의 공간을 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선언들, 즉 미국독립선언, 프랑스인권선언, 그리고 그 뒤를 따라는 한국의 헌법을 포함해 모든 자유 민주주의의 헌법들은 인간의 평등을 선언한다. 근대의 정치사를 볼 때, 자유주의의 역사적 전개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하나는 이 선언을 곧바로 사회에서 실현하는 것으로, 그것은 루소,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에서 보듯이 혁명에 의한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이 제시한 형식적, 규범적 원리를 인간의 지식과 교육의 확산, 사회경제적인 발전, 정치적 실천을 배경으로 한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현실주의적 자유주의의 이론과 정치관은 이 과정에 관한 것이고, 필자 역시 이 경로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힘은 그것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성을 갖는 원리와 가치를 함축하고, 인간의 사회경제적 발전, 문명, 교육의 발전과 더불어 그 보편성을 확대시켜왔다는 데 있다. 동시에 보편적 인권의 내용은 심화되어왔다. 자유주의의 장점은 그 개방성과 자체 교정 능력을 갖는 유연성으로 인해 현실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만나면서 굉장한 현실 적응 능력을 실현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이념은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운영함에 있어 그 정치적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될 수도 있고,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4. 한국 자유주의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조명

전후 냉전하에서 한국 국가 건설과 정치(체제)를 만들고 떠받쳐온 두 축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분단국가의 제도화가 완성되고, 그것이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이 자유주의는 냉전과 탈냉전 시기를 경과하는 동안 여전히 포착하기 어려운 현대의 하나의 대표적인 이념, 교리, 또는 이데올로기로 남아 있다. 그로 인해 현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정신적 문화적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전히 애매한 상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이 동반한 결과는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의미, 지향, 가치에 대한 과부하가 아닐까 한다. 그동안 한국의 지적 풍토 내지 환경은 해방 이후 냉전과 분단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자유주의의 의미와 가치, 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는 현상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지금 한국의 역사와 정치, 그리고 사회를 통해 이해되거나 경험된 자유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에 대한 역사적, 정치 사회적 성찰의 필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이해와 지식은 민족 독립운동 과정에서 중심적으로 역할했던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한정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자유주의는 일제하 독립운동 시기로부터 분단국가 건설과 민주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현대사와 민주주의 실천 과정에서 미미했고, 애매한 것이었고, 또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독립운동 시기에서나, 해방 이후 국민 형성과 근대화를 포괄하는 국가 건설, 냉전하의 분단국가라는 조건하에서 그 모든 것의 정신적, 이념적 기반이 오로지 민족주의만이었나라는 질문을 만나게 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국민들의 이념적, 정신적 기반은 세계에서 널리 수용되는 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대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를 포함하는 이러한 지적 한계들은, 지금까지의 한국 현대사의 관점이나 퍼스펙티브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봐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게 한다.

 

결론

1) 현대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균형적으로 결합될 때, 이념, 가치, 교리로서의 자유주의와 정치 체제 내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균형을 이룰 수 있고, 양자는 비로소 상보적으로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서는 자유주의의 이념, 원리, 가치가 일제 식민 통치와 냉전적 이념들의 양극화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취약성을 면치 못했다. 이 불균형이 해방 이후 권위주의 하에서만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과부하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에서조차 민주주의를 취약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자유주의의 지적, 문화적 사회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2) 한국의 역사에서의 자유주의가 지닌 역할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가 이론, 교리에서만이 중시되고, 그것만이 관심이나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행위 윤리나 규범으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최근년의 새로운 연구 경향을 통해 발견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무적이다. 필자가 이 강연안을 만들면서 자유주의에 대해 특히 염두에 두었던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자유주의가 동반하는 가치, 사유 형태, 행동 양식에 있어 현실주의적 사고의 중요성이다. 즉 자유주의를 동반하는 현실주의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계화라는 조건 속에서의 지역성, 국가성은, 자유주의가 보편주의를 본질로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역성, 국가성과 중첩된다는 사실이다. 즉 자유주의와 애국심(patriotism)의 동거를 말한다. 세 번째는 전제정/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의 반대로서의 자유주의의 의미와 역할이다. 그것은 자유주의 이념의 중심 속에 그리고 행위의 규범 속에 동시에 내장돼 있는 원리로서의 온건함과 절제를 의미한다.

3) 오늘의 이 에세이의 주제는 그것이 비록 역사의 과정에서 실패가 아니라면 취약했다 하더라도 중심을 만들기, 또는 균형자를 만들기가 아닐까 한다. 그것이 곧 자유주의와 자유의 역할이다. 이 점에서 젊은 세대의 연구자들이 한국 현대사를 통해 드러난바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분법적 역사 이해와 정치적 행위의 틀을 지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관심과 노력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48년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이념, 비전, 행동 정향을 탐색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는다. 본 강연자는 자유주의로부터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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