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쓴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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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쓴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0.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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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작년 11월에 작은 책을 한 권 냈다. 엄마에 대한 책이었다. 함께 떠난 남미여행 한 달의 이야기,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다음날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엄마가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서 7개월을 보낸 이야기, 엄마가 남긴 일기와 기록으로 새로 알게 된 엄마의 인생 이야기를 모았다.

책을 쓰면서 온전히 나를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함께 보낸 50년 세월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마음에 간직하기 위함이라고. 형제자매 없이 홀로 자란 엄마와 혈육처럼 가까웠던 친구 분들께 뭔가 기념이 될 만한 것을 드리기 위함이라고.

그러면서도 굳이 책이라는 형태를 택해야 하는 것인지가 고민스러웠다. 밥벌이 중 하나가 번역이다 보니 가장 익숙하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매체가 책이긴 했다. 하지만 유명인사도 아닌 엄마 얘기를, 더군다나 부잣집 첩으로 들어간 엄마의 외할머니, 요정을 운영한 내 외할머니, 엄마 평생 이어진 부부 간의 불화 등 내가 굳이 밝히지 않아도 그만인 일들을 드러내 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책을 내면서는 내 경험과 뭔가 접점이 있는 독자들에게 콩알만큼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남미를 다녀온 독자, 엄마와 여행을 해보았거나 하고 싶어 하는 독자, 병원 치료를 받지 않고 집에서 마지막을 맞고 싶어 하는 암환자의 가족이나 자녀,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는 그럭저럭 읽을거리가 되지 않을까.

책이 나온 후 내 지인들, 그리고 엄마를 아는 가까운 분들이 잘 읽었다며 연락을 해왔다. 읽어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감상까지 나눠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남미 여행을 다녀왔다는 선배는 내가 차마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 페루의 쥐고기 요리를 당당히 주문해 맛봤다는 경험을, 엄마 또래인 동문 합창단 선배님은 엄마 일기를 읽으면서 마치 당신 살아온 과정을 보는 것 같아 많이 공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소감을 전해 주었다.

익명의 독자들은 인터넷 서점에 평을 올렸다. 부모님을 떠나보낸 독자는 그때의 막막함을 다시 떠올렸다고 했고 부모님이 곁에 있는 독자는 헤어질 때를 미리 내다보거나 어머니와 함께 여행 갈 마음을 먹는 기회가 되었다고 했다.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생기기 마련인 갈등과 다툼에 마음 고생하던 독자는 우리 가족 이야기에서 동병상련의 위로를 받았다고 썼다.

내게 가장 감동을 주었던 두 가지 소감은 ‘우리는 우리가 태어날 때 환영받는 것만큼이나 죽어갈 때 따뜻하게 존중받고 싶다. 나는 이 책에서 그런 존중 받는 죽음을 보았다.’라는 어느 서평, 그리고 ‘이 책은 책이 세상에 왜 필요한지 새삼 다시 알게 만들어 줬다. 바로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듣기 최적의 도구가 바로 책이니까.’라는 어느 출판평론가의 말이었다. 친정집에서 꼼짝 못한 채 엄마의 마지막 길을 지키면서 다른 가족들의 무관심에 분노했던 몇 달의 세월이, 엄마가 떠나면서 내 삶을 떠받치던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는 막막함이, 엄마 얘기를 굳이 책으로 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답을 내지 못했던 시간이 그야말로 따뜻하게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글쓰기 선생 노릇을 하면서 나는 대학생들에게 늘 말해 왔다. 글은 평가 받고 점수를 매기기 위한 수단이 아닌, 소통하는 방법이라고. 한 학기 수업에서 학생들은 직접 글을 쓰는 것보다 동료 학생의 글을 읽고 나름의 의견과 감상을 담아 댓글을 쓰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된다. 글이 더 깊고 넓은 소통의 토대가 된다는 걸 경험하게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글을 바탕으로 한 소통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의 글을 열심히 읽고 댓글도 꼼꼼히 살피며 강의실 토론에 참여했지만 내 이야기를 담은 글을 독자 앞에 내놓지는 않았으니까. 책을 읽은 후 일부러 시간을 내 인터넷 서점에 서평을 올리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끼적거린 것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그 모습이 다시 내게 위로를 주는 경험.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은 결국 우리가 이렇게 소통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생각한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 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80여 권의 번역서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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