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학 정초한 고유섭, 조선문화 사랑한 야나기, 중국의 새로운 미적표준 제시한 캉유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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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학 정초한 고유섭, 조선문화 사랑한 야나기, 중국의 새로운 미적표준 제시한 캉유웨이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1.22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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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 미학과 한국 현대미학의 탄생 - 캉유웨이, 야나기, 고유섭 | 정세근 지음 | 파라아카데미 | 223쪽

 

이 책은 한국 미학의 초석을 놓은 고유섭을 중심으로, 중국의 캉유웨이와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를 통해 20세기 동양에 불어 닥친 제국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자유와 저항 의식을 근저로 한 동양 미학을 재조명한다.

미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서양에서 유래된 것이기에, 우리나라에서 미학이 정립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 미학의 정립을 시도한 자가 바로 고유섭이다. 고유섭은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서양철학사를 공부하였고, 평소 미술에 관심이 있어 서양미술사에도 심취했다. 서양의 철학과 미술에 대한 관심은 곧바로 우리의 미술로 이어지고, 한국적인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탑에까지 시선이 닿게 된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우리의 탑에서 찾은 덕이다. 한국의 현대미학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캉유웨이는 금석학의 영향으로 왕희지 풍의 아리따운 글씨를 넘어 한나라의 강인한 글씨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중국의 새로운 미적 표준을 제시하고 싶어 했다. 글씨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역사가 바뀐다. 금석학이란 쇠와 돌에 새겨진 글을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캉유웨이가 표준으로 삼고 싶었던 쇠는 청동기를, 돌은 한나라와 북위의 비문이었다.

캉유웨이는 황제의 권력을 뒤에 업고 무술정변을 일으켜 청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비록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지만, 글씨에서 중국의 고유한 힘을 찾고자 했다. 김정희의 추사체가 모범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금석문이며, 그는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내 탁본을 중국으로 보내기도 한다. 문화는 이렇게 주고받는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문화를 사랑했던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시인 블레이크를 좋아했다. 비록 자신의 조국인 일본은 제국주의를 주창했지만, 자신은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자유를 주장했다. 야나기는 조선의 도자기를 흠상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민속품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른바 민예란 민중예술의 준말로 이름 없는, 평민을 위한, 생활 속의 예술을 가리킨다. 미술평론가이기도 한 야나기는 한중일 삼국의 예술적 특징으로 선, 형, 색을 꼽고 특히 한국의 미를 비애로 단정한다. 비극은 인류의 보편적 감정을 담는 예술의 형식이라는 전제 아래 주장한 것이지만 조선의 특질을 슬픔으로 본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고유섭은 우리에게 새로운 미적 표준을 제시한다. 캉유웨이가 서예를 논하면서 모범으로 삼아야 할 대상을 바꿨듯이, 고유섭은 조선 전역에 세워져 있는 탑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고는 통일신라시대의 탑을 통해 야나기가 말한 ‘비애의 미’를 버리고 ‘조선의 기백’을 찾아낸다. 고유섭에 이르러 한국의 아름다움은 대칭이 아닌 비대칭에서 운동성을 확보한다. 이른바 ‘무기교의 기교’를 바탕으로 드러나는 비균제성(asymmetry)이야말로 한국미의 음악적 율동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생동성은 그가 말하는 ‘구수한 큰 맛’과 연결되며, 백자와 같은 단채조차 그 적막함을 ‘생명의 내적 오묘함’으로 예술화한 좋은 예가 된다. 고유섭에 이르러 한국의 현대미학은 동양 미학의 범주와는 다르게 독립적인 위상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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