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는 ‘ᄇᆞᆰ잣’이라는 이름의 ‘光明 가득한 성곽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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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는 ‘ᄇᆞᆰ잣’이라는 이름의 ‘光明 가득한 성곽국가’였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2.10.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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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86)_ 백제百濟는 ‘ᄇᆞᆰ잣’이라는 이름의 ‘光明 가득한 성곽국가’였다.


“葉公好龍” 말로는 좋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는다.  
(출전: 漢 류향 劉向 『신서•잡사 新書•雜事』)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에 지친 건지 집단 면역이 생겼다고 믿는 건지 지구인들은 이제 더 이상 차단되고 갇힌 생활을 하려들지 않는 것 같다. 해외여행도 한결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다. 다만 항공료가 여전히 비싸다. 저가 항공사를 이용하려 해도 전에 비해 터무니없는 가격이 요구된다. 수요가 공급가를 결정하는 건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다. 소비자는 구매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국가 운영과 운영자의 결정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원수로 격상되어 앞으로 10년은 더 최고 통치자로 군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나라는 워낙 인구가 많고 지역이 광대하니 항공 산업도 엄청나게 확장 발전했다.  

Cathay Pacific Airways라는 항공사가 있다. 홍콩 공항을 허브 공항으로 하는 영국계 항공사로 1946년에 창설되었다. 영어식으로 ‘캐세이’라고 읽는 Cathay는 거란족이 세운 요 遼나라가 중국을 대표한다고 인식해서 생긴 서구의 명칭이다. 다시 말해 중국은 곧 거란족의 나라라고 판단한 영국을 위시한 서구인이 거란족의 중국 명칭인 카타이로 중국을 지칭한 것이다. 거란을 한자로는 契丹(글단)이라 쓰고 우리는 거란, 중국은 Cidan 또는 Qìdān이라고 한다. 현재의 중국어 병음은 xie dan이다. Katai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다. 

중국을 가리키는 엑소님(exonym, 외래 표현)은 다양하다.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중국을 뜻하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키타이Kitay', 몽골어 '햐타드Hyatad' 등은 모두 거란인들의 자칭 '키탄Khitan'과 ‘키타이Khitai’에서 비롯되었다. 12세기까지 아라비아어와 페르시아어 문헌은 거란(북중국)을 'Cathay' 또는 'Khitay'라 불렀다. 남중국(宋)은 ‘Mangi’ 또는 ‘China’였다. 

일반인들은 중국을 지칭하는 말로 영어 China와 漢語 中國만을 알고 있겠지만, 서양이나 여타 중국과 지리적, 정치외교적, 또는 교역 상 접촉이 빈번한 국가들의 경우 동방에 위치한 중국의 국가명이 시대적 상황 변화에 따라 달리 쓰였다. 왕조가 달라지면 다시 말해 지배 집단의 변화를 통한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 국명이 달라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中華民國의 줄임말로서의 中國이 국가 명칭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11년 쑨원(孫文)이 이끄는 辛亥革命 이후부터다. 그 이전에는, 특히 夏殷周와 춘추전국시대에는, 천자가 계신 京師 즉 수도를 중국이라 했다. 『사기』 「오제본기」에 따르면, 유희劉熙가 “제왕이 도읍한 곳이 (나라의) 가운데이므로 중국이라고 한다”(劉熙曰··· 帝王所都爲中故曰中國)라고 말했다.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 서문의 ‘中國듕귁’에 대해 정인지는 해례본에 “황제 겨신 곳 즉 상땀常談에 이르기를 江南이라”고 말했다. 이는 ‘중국’을 국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황제는 대국 명나라의 건국주 주원장이고 그의 거점은 남경이었다. 물론 넷째 아들 영락제가 수도를 북평 즉 북경으로 옮긴 건 1421년이고,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해는 1446년이므로 엄밀히 말해 중국은 북경이라고 해야 옳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특히 북중국을 세리카 Serica라 불렀다. ‘비단실의 나라’라는 뜻의 말이라고 하는데 어원이 명확하지 않다. 중국인은 Seres로 호칭되었다. 한편 페르시아어 지리서와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역을 '치나支那(China)' 또는 '치니스탄 震旦(Chīnist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중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탐가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이는 선비족 탁발씨拓跋氏의 족칭 타부가치Tabugach의 음 와전音訛傳 일 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대상에 대해 다양한 명칭이 존재한다. 하나의 명칭도 시간과 공간이 달라지며 소리값의 차이를 보이는 다수의 변이형이 출현한다. 그래서 百濟라는 국명도 伯濟, 百殘 등의 이표기가 있다. 이들이 나타내고자 한 공통의 음가를 알게 되면 그 소리가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百濟를 구다라(Kudara)라고 읽고 그 의미를 ‘큰 나라’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梵語雜名』을 보면 인도인들은 고구려를 무쿠리라고 불렀고, 돌궐비문에서 돌궐인들은 고구려를 뵈클리라 지칭했다. 유감스럽게도 백제에 대한 기술은 없다. 그러나 그건 그쪽 사정이고, 우리는 음운대응 양상을 보이는 百濟-伯濟-百殘이라는 이표기로 미루어 이들 명칭이 음차어라는 것을 안다. 百濟를 ‘百家濟海’의 줄임말로 보고 국명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新羅를 애신각라愛新覺羅에서 나온 말로 보는 것만큼이나 생뚱맞다. 

과거에 나라와 나라 간 통상 및 외교와 더불어 문화 예술의 교류는 상상 이상으로 활발했다. 고구려는 중원의 북조 국가들을 통해 불교를 수용하고 서역 악기를 받아들였다. 백제 또한 남조를 통해 여러 외래 악기를 받아들였다. 나아가 고구려는 수나라의 칠부기 七部伎와 九部伎, 당나라의 十部伎에 악사와 악공을 파견할 정도였다. 백제·고구려·신라의 악사와 악생들은 구다라가쿠 百濟樂·고마가쿠 高麗樂·시라기가쿠 新羅樂의 이름으로 삼국악 三國樂을 고대 일본조정에 소개했다.

백제, 고구려, 신라를 일본인들이 각기 ‘구다라’, ‘고마’, ‘시라기’라 부른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알타이문명론』의 저자 김채수 교수는 한국어 ‘곰나루’의 중국어 표현이 ‘熊津’, ‘큰 마을’의 의차어가 ‘百濟’라고 했다. 곰나루와 熊津의 관계는 납득할 수 있으나 百濟가 큰 마을의 意借라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나는 백제의 고대음을 /ba(i)ji/로 추정했었다. 그런데 남광우, 유창순 두 학자의 『고어사전』이 자칫 오류를 범할 뻔한 나를 구해주었다. 

남광우의 사전을 보면 百濟와 이형태인 百殘의 고대음은 공히 ‘ᄇᆞᆰ잣’이다. ‘ᄇᆞᆰ’은 박쥐의 고어형인 ‘ᄇᆞᆰ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밝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문제는 ‘잣’으로 이는 城을 가리키는 우리말 고어다. 잣을 재라고도 한다. 제주도 방언에서 ‘잣’은 ‘긴 돌담’을 가리킨다. 城을 지칭하던 말이 세월 따라 변전한 결과라 싶다. 

이번 칼럼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어 기쁘다. 한자어 백제(백잔)는 고어형 ‘ᄇᆞᆰ잣’의 音寫다. ‘ᄇᆞᆰ’과 ‘잣’의 합성어인 백제는 ‘광명 가득한 성곽국가’라는 뜻의 말이다. 그렇다면 강릉 城山의 옛말은 잣뫼, 城串의 고어는 잣곶이랄 수 있다. 전북 익산의 배산이라는 지명은 바위산이 변한 말로 일대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배산을 잣뫼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 성을 축조했기 때문이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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