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누워 있는가? - 베른트 브루너의 『눕기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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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누워 있는가? - 베른트 브루너의 『눕기의 기술』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
  • 승인 2022.10.23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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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간밤에 휴대전화를 누워서 보다가 놓쳐서 눈을 다쳤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침대에 누워서 누가 가져다주는 아침밥을 받아보는 생각도 한 번은 해보았을 것이다. 거실 말고 잠자리 앞에 있는 텔레비전을 누워서 보다가 잠이 든 경험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상반신을 일정한 각도로 세울 수 있는 침대도 나오다 보니 책읽기와 글쓰기까지 누워서 못할 이유도 없어졌다. 그럼에도 남에게 자신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하루 중 상당 시간을 누워서 지낸다고 당당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연구와 실험으로 밤샘 작업을 해야 하는 교수의 연구실에 간이침대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왠지 지독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는 말도 듣는다. 성실과 근면이 강조되는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눕기’의 미덕을 말하고 그 필요성을 내세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독일 작가 베른트 브루너의 『눕기의 기술Die Kunst des Liegens』은 ‘눕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그 역사와 생활사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Die Kunst des Liegens: Handbuch der horizontalen Lebensform by Bernd Brunner

저자는 우선 우리가 인생의 최소 3분의 1은 누운 채로 보낸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몸통을 수평에 가깝게 뒤로 기대고 다리는 몸통보다 더 높이 올린 자세”를 눕기로 정의한다. 이처럼 몸의 긴장을 완전히 이완시킬 수 있고 잠을 위한 필수적인 자세인 눕기가 특히 서구사회에서는 게으름과 나태의 상징이자 푸대접을 받는 자세임을 개탄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서구에서도 눕기와 일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왕과 귀족, 지식인의 특권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프랑스 작가 공쿠르 형제는 작가가 완수해야 하는 “인생의 세 가지 위대한 행위를 탄생, 성교, 죽음”이라고 했다. 세 가지 행위의 공통점이 모두 누워서 이루어진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것이다. 눕기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그의 침상에서의 명상과 글쓰기 작업이 없었더라면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침대에 누워 지난 기억을 떠올리고 그 조각들을 재구성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고 그 기억을 누워서 기록했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상체를 조금 세우기는 했지만 누워서 식사했다고 한다. 저자 역시 알약을 먹을 때 말고는 누워서 식사하는 것이 건강상 나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왕과 귀족들이 침대에서 사람들을 접견하는 예도 빈번했다. 침대에서 누군가를 접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상당히 높은 신분에 속해있고 침실이 사적인 공간만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에도 지방 재판장인 시몽이 침대 위에서 소송인을 맞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장밋빛 리본으로 장식된 수면 모자까지 쓰고 침대에 누운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그가 누워서 접견한 것은 재판관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이유 말고 1미터가 안 되어 보이는 단신의 빈약한 몸을 감추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눕기가 이렇게 중요하고 삶의 일부라면 수면의 질과 관련하여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 궁금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똑바로 누워 자거나 배를 깔고 엎드려 자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고 옆으로 특히 오른쪽으로 자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또한 수면 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잠을 많이 자는 것은 체중 감량에 효과가 있으며 잠을 적게 자면 적게 먹어도 살이 찐다고 경고한다. 다이어트를 위해서도 일찍 자면 야식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인공조명을 피하라는 조언은 농촌 사회에서는 일견 타당한 말처럼 들리지만, 야근해야 하는 직장인과 학업에 몰두해야 하는 학생에게는 실천하기 어려운 조언일 것이다. 나이가 든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코골이와 하지불안증후군, 생체리듬의 차이로 부부가 함께 잠자리에 들기 어려운 경우가 생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분리된 침대나 따로 덮는 이불을 권하고 그것도 힘들다면 따로 자는 것이 ‘관계의 지속’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눕기의 중요성이 이렇게 큰데, 다행히 우리 민족은 좌식 문화를 통해 눕기를 체화했으니 눕기에 최적화된 유전자를 지닌 셈이다. 역사가 지그프리트 기디온이 “동양인의 삶의 자세는 휴식에 기반하며, 서양인의 삶의 자세는 노력에 뿌리가 있다”라고 지적한 것도 눕기의 동양적 근원을 말한 것이다.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항공기를 이용한 여행의 질은 몸의 자세를 얼마나 눕힐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말이다. 또한 눕기와 깨어나기 그리고 일어나기 사이의 시차가 커질수록 휴식과 수면의 질이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눕기가 게으름과 나태의 상징이 아닌 휴식과 명상, 재충전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고단한 일의 대가임을 자신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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