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안의 출가, 불교 밖의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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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안의 출가, 불교 밖의 출가
  • 김호성 동국대·불교학
  • 승인 2022.09.25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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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출가 정신의 전개: 붓다에서 법정까지』 (김호성 지음, 민족사, 320쪽, 2022.08)

 

  뜻밖의 일입니다. 『대학지성 In&Out』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근래 펴낸 저의 책 『출가정신의 전개 – 붓다에서 법정까지 -』(민족사)를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까지 수십 년 글을 쓰고 책을 펴냈습니다만, 한번도 ‘불교 밖’을 향해서 발신(發信)한 적은 없습니다. 오직 관심은 ‘불교 안’에 있었습니다. ‘불교 안’의 사람들에게, 스님들에게, 불자들에게 말을 걸었을 뿐입니다. 이번 책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불교 밖’의 언론으로부터 청탁을 받았던 것입니다.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불교 밖’의 사람들에게, ‘불교 안’을 향해서 쏟아놓았던 ‘출가’라는 주제의 이야기가 무슨 관심사가 되기나 할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어쩌면 ‘불교 밖’의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끌 수 있는 부분을 잘 찾아보면 없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간략히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저자로서는 그런 이야기를 독후감 형식이든 서평 형식이든 독자로부터 들을 수 있다면 더 이상 큰 행복이 없겠습니다. 몇 편의 독후감을 받아보았습니다만, 아직은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독자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저 역시도 이 책을 소개해 달라는 ‘불교 안’ 언론의 청탁을 받고 글(「오늘, 다시 생각해 보는 출가정신」, 『불교평론』 91호. 2022년 가을호)을 썼습니다만, 오늘 드리는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감히 할 수 없었습니다.


1.

  『출가정신의 전개』는 지난 20여 년 동안 쓴 8편의 논문을 모은 책입니다. 그 8편 중에서 ‘단 한 편’만 읽는다면 첫 번째 논문을 읽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불교화된 효(孝)담론의 해체 -  ‘중국 – 유교 및 인도 – 힌두교’전통과 관련하여 -」라는 제목입니다. 

  ‘불교화된 효’라고 했습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효’를 말하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중국에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유교 측으로부터 불교는 수많은 공격을 당했습니다. ‘폭력적인 억압’을 받았습니다.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다”라면서, 사교(邪敎)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불교에서도 뜻있는 스님들이 대응논리를 계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개는 방어논리였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효를 말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불교 측에서도 있다고 주장한 효는 불교에도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께 잘 해드리자, 이런 이야기를 안 하는 종교나 문명이 있을까요? 문제는 유교에서 말하는 효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충(忠)과 결합하여 천하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였던 것이지, 단순한 ‘가족윤리로서의 효’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효’는 불교에서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유교에서 말하는 효는 인도-힌두교에서도 말했습니다. 이 점은 널리 안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힌두교와 유교는 너무너무 닮은 점이 많습니다. 형이상학도 닮았지만, 윤리학도 닮았습니다. 인도-힌두교에서 말하는 ‘다르마(dharma, 法)’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의 출가가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가장(家長)으로서 가정생활의 여러 의무들을 행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낳고 기르며, 가업(家業)을 계승하고, 또 조상제사를 받드는 일이 가장의 의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주기(家住期)’의 의무(다르마)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반체제(反體制)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불교의 설 자리는 위태로웠던 것입니다. 인도에서고, 중국이나 조선에서고 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효는 불교 안에 없었다’라는 이 선언을 당당하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 이상 수세(守勢)에 처할 일도 방어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한 체제가 갖는 가부장제, 가족주의, 가족중심주의가 그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을 억압해 왔는가 생각해 볼 때 그렇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유교 측에서 그러한 과거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응답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힌두교와 유교가 공히 갖고 있었던 법도(法度, 다르마)를 생각할 때, 일찍이 불교는, 붓다는, ‘출가’라는 것을 감행함으로써 가부장제, 가족주의, 가족중심주의를 초극(超克)하는 것을 시대를 앞서서 선취(先取)했던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출가는 단순히 ‘집’이나 ‘가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족주의, 내지 가부장제’를 넘어서는 일이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교인부터 명심시켜야 했습니다. 문제는 애당초 불교에 없었던 효가 ‘불교 안으로 들어와서 불교화’되었던 데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불교화된 효 담론의 해체’가 시급했던 것입니다. 

 

사진: 불교 TV

2.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정치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정치는 아닙니다. 출가도 정치는 아닙니다. 탈(脫)정치입니다. 정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붓다는 세속에 그냥 살았더라면, 작든 크든, 명색 한 나라의 왕이 될 신분이었습니다. 붓다의 출가가 갖는 여러 의미 중에서 ‘탈정치, 탈권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붓다가 그러한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에 정치철학이나 정치사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도 있습니다. 요즘 『대통령의 책 읽기』(이진우 외 25명, Humanist, 2017)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시겠습니다만, 그 책은 대통령에게 ‘이 책을 읽어주십시오’라고 한 권의 책을 권유하는 형식인데, 아마도 모든 독자들은 ‘나라면 어떤 책을 추천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저라면, 『금강경(金剛經)』이라는 불교 경전을 추천했을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무수히 반복하면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입니다. “행위를 하되, 상(相)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상(相)’이라는 말은 상(想)의 뜻입니다. 생각이 없이 행위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일까요? ‘나는 대통령이다’,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다’, ‘나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서 ‘그저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번 책에서 『금강경』을 인용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뜻은 통합니다. 왜냐하면, 『금강경』에서 말한 ‘상’이라는 것이 곧 ‘출가’라고 할 때의 ‘가(家)’이기 때문입니다. ‘상에 머물지 말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못 하더라도 심리적으로나마 ‘집’을 떠나라고 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가해서 살아라’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화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화’가 한 번 된다고 해서, 그것이 늘 공고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는 것 아닐까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물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흔들고 있는지 성찰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불교적 입장에서 그 이유를 하나 제시할 수 있다면, 바로 ‘연(緣)’입니다. 연고주의(緣故主義)라는 말 안에, 불교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많이 이야기하는 인연(因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연은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좋은 뜻만은 아닙니다. 인연은 ‘의지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만, 그렇게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안정감을 줍니다. ‘집’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인연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과 같은 연고에 갇히게 될 때, 정의와 공정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는 혈연, 지연, 학연만을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출가정신의 전개』의 한 각주(282쪽 각주 42)에서 이들 세 가지 인연 외에 교연(敎緣, 종교연)과 계연(階緣, 계급연, caste연)을 더 말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생각해 보니, 우리의 민주주의를 뒤흔드는 연고주의 중에 당연(党緣, 정당연, 정치적 견해의 인연)도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하기는 민주주의가 정당정치라고 한다면, 당연은 어쩔 수 없는 인연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가능성조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연’이라는 ‘집’을 넘어설 수 없다면 결국 정치인들이 늘 말하는 ‘통합’이니 ‘민생’이니 하는 것도 사실은 구두선(口頭禪), 공염불(空念佛)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정당정치가 하나의 당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당연 조차 ‘출가’해야 한다고 한다면 결국 불교의 출가는 탈(脫)정치로 돌아가게 됩니다. 요는 그러한 탈정치의 정치인만이 민초(民草)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성공한 정치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당연’ 이야기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출가’의 의미를 확장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집’이 더 있습니다. 집 가운데 가장 큰 집이 ‘국가(國家)’라는 집입니다. ‘출가의 불교정치학’에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연고주의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출가의 국제정치(학)’가 요청되는 까닭입니다. 지면이 없어서 자세히 부연할 수 없지만, 이 이야기는 책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참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부족한대로 이렇게 ‘불교 밖’에 계시는 분들도 저의 책 『출가정신의 전개』를 읽으신다면, 혹시라도 얻을 수 있는 화두(話頭)를 두어 개 말씀드렸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청탁해 주신 『대학지성 In&Out』에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김호성 동국대·불교학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에서 학사 및 석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인도철학과 불교에 걸쳐서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원각경・승만경』(공역) 등의 역서와 『천수경의 비밀』을 비롯한 저서 등이 30여 권 된다. 그 중 학술서로는 『불교해석학 연구』 등이 있는데, 이 책이 9권째가 된다. 일본의 대학들 3곳에서 방문 연구를 하였다. 앞으로 집중하고 싶은 주제는 『무량수경』, 원효, 신란(親鸞) 등의 정토불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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