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의 자유: 민권과 국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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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의 자유: 민권과 국권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9.05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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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19강_ 김현주 원광대 교수의 「근대 동양에서의 자유: 민권과 국권」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두 번째 섹션 ‘자유와 민주주의: 역사와 전개’ 제19강 김현주 교수(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근대 중국의 자유: 민권과 국권


김현주 교수는 근대 중국에서 자유와 인권 개념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는지 추적한다. 물론 한 학자의 말을 빌려 근대 중국인의 관심이 “개인을 국가에서 해방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구망도존(救亡圖存)에 있었”던 까닭에 그 상황이 녹록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쑨원(孫文)과 국민당의 인권 개념, 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한 중간당파를 대표하는 중국민주동맹(민맹)이 전개한 자유주의 인권 운동과 그들이 이야기한 인권 개념을 따라가 본다. 결국 민맹의 중도적 입장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권과 국권의 갈등과 결합”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대내외적 상황이 절박해짐에 따라 전자를 희생하고 후자로 기울게” 되는바, 이는 곧 중국에서 “자유주의의 취약성을 보여준 것”이자 “후자에 대한 전자의 패배를 초래”하였다고 이야기한다. 다만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 타협 속에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본권”으로서 “신체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내세운 점은 평가될 만하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여전히 “자유인가 생존인가”, “개인인가 국가인가”의 선택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볼 것을 말한다. 

 

지난 8월 6일, 김현주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1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들어가며

중국 고대에는 인권 개념이 부재했지만,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서양의 정치 개념과 사상이 전파된 이후, 중국인들도 점차 인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서양의 가치 개념들이 의인화되어 중국에 전파되었는데, 인권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더선생(德先生: Democracy), 싸이선생(賽先生: Science)과 리선생(李先生; Liberty)과 함께 회자되게 된 허선생(和先生; Human rights)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인권의 보편주의적 가치의 실현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가 더 중요하던 시기였으므로 근대 중국인의 관심은 개인을 국가에서 해방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구망도존에 있었다. 그리하여 청 말에는 인권이 아니라 민권(民權)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유와 평등 등 권리 추구를 위한 운동을 했고,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난 후 비로소 인권과 민권을 구분하게 되었다. 중화민국 수립 후 한동안 인권과 민권을 혼용하여 사용하다 5·4 신문화운동을 계기로 민권보다는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정치적 파벌을 통해 인권 운동을 전개했다.

국민당 통치 시기 국민당 이외에 다양한 정치적 파벌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중국 자유주의 지식인과 민족 부르주아들이 다수 참여한 민맹은 처음 조직될 당시에는 자유주의적 성격이 강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민당의 전제 정치를 반대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 공산당의 사회주의 혁명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민맹의 중도적 입장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권과 국권의 갈등과 결합을 보여준다. 양극단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들은 중국의 대내외적 상황이 절박해짐에 따라 전자를 희생하고 후자로 기울게 되는데, 이것은 곧 자유주의의 취약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결과적으로 후자에 대한 전자의 패배를 초래하게 된다.

 

쑨원과 국민당의 인권 개념

민맹의 인권 개념과 인권 운동을 살펴보려면, 우선 당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의 인권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국민당의 인권 개념은 기본적으로 국민당의 정신적 지주였던 쑨원이 제시한 것이었다. 쑨원은 사상가라기보다는 정치가로서, 정치적 상황과 필요에 의해 자신의 인권 개념을 수정해나갔다.

본래 쑨원은 루소의 천부인권설을 수용하였다. 그는 루소의 공로가 바로 천부인권, 즉 민권의 제창이라고 여겼을 정도로 천부인권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신해혁명을 성공하기 전까지 이러한 천부인권설이 그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쑨원은 새로운 인권설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그가 이후 계속해서 강조하게 되는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인권설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민권을 실행하는 것이 서양 선진국들을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인권을 더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인권을 축소하는 쪽으로 진행된다. 그와 함께 국민당은 천부인권론을 포기한다.

그리하여 국민당의 인권론은 다음의 글로 정리되었다.

헌법의 권리는 천부인권의 이론에 기초하지 않는다. 실시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법률에 조금의 의문도 없어야 한다. 오직 법률이 인정한 권리만이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자연히 법률이 권리를 창설하고 바꿀 수 있다. 법으로 정해진 권리 형식을 가진 헌법상의 권리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법률로 제한하고 싶었던 것은 특히 당시 구제도로 회귀하려는 반동파,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하고 있는 군벌들을 경계한 것이었다. 중화민국과 국민당의 존재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그들의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중화민국과 국민당을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의도였다. “혁명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된 인권은 결국은 인권을 제약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쑨원 사망 이후 장제스(蔣介石)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인권 운동의 전개 배경은 다름 아닌 국민당 내에서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Black Shirts”를 모방한 “부흥사(複興社)”라는 조직(1932년 3월 1일)의 성립이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인권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자유주의 인권 운동의 전개

당시 중국 공산당이 급진적 폭력 혁명을 주장했던 것과 달리 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한 중간당파(민맹)는 인권 보장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 계기가 된 것은 1929년 반포된 국민당의 「보장인권명령(保障人權命令)」이었다.

「보장인권명령」은 언뜻 보기에는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 속에 함정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후스(胡適)와 뤄룽지(羅隆基)를 대표로 하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국민당이 인권의 보장이라고 말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호한 규정은 결국 국민당과 국민당 정부에 지나치게 자의적인 권한과 권력을 부여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인권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들은 당치(黨治)와 인치(人治)의 해로움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동시에, 헌정(憲政)과 법치를 통해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맹의 자유주의 인권 개념

중국민주동맹의 창시자 중 하나인 뤄룽지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인권을 해석하였다.

인권이란 인간됨의 필수적 조건이며, 의식주의 취득과 신체의 안전 보장이고, 모든 개인의 개성의 발전, 인격의 배양, 최고의 자아를 형성하고, 개인의 생명상의 행복을 향유함으로써 나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목적을 이루는 필수 조건이다.

1940년대까지 중국 자유주의 인권관의 새로운 발전은 공리주의 인권 사상과 초실증적인 천부인권 사상이 결합된 것이었다. 이 시기 중간당파가 가장 강조했던 것은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과 “인간의 가치”였다. 그러나 인권에 대한 제약을 주장한 이들은 모두 중국 사회의 생존권을 그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중간당파는 “중국 사회의 기본 문제를 해결하려면,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을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생존권 문제가 절박한 상황에서도 민맹으로 대변되는 중간당파는 자유권을 포함한 인권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인권과 민권이 당시에 혼용되었지만, 양자를 구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인권이 민권보다 범위가 크며, 더 기본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권은 사람됨(做人)의 권리이고, 민권은 한 국가에서의 국민으로서의 권리로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보았다. “국민이 되려면 무엇보다 사람이 되어야 하고; 민권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인권을 얻어야 한다(要做民, 更要做人; 要民權, 更要人權)”라고 보았으며, 특히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의 최대의 가치가 “독립적 인격과 건전한 공민의 양성”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권을 보다 중시했다.

물론 중간당파는 국가의 독립적 주권이 인권 보장에 중요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민맹 정치보고에서 지적하기를, 중국 항전의 목적은 바로 “국가의 독립과 자유”이고, 중국이 과거에 민주 국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외부로부터의 압박과 내부로부터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며,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내부의 제약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민맹은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생존 쟁취를 인권보다 우선시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민맹의 정치적 입장과 인권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절충적 인권 추구

인권관은 국가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국가관에 따라 인권관이 달라질 수 있다. 민국 시기 대표적인 국가관을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는 국민당에 의해서 추구되는 국가주의적 국가관이다. 둘째는 공산당에 의해 비판되는 계급주의적 국가관이다. 그리고 셋째는 중간당파에 의해 추구되었던 자유주의적 국가관이다. 

중간당파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가관 모두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공산당이 국가를 계급투쟁의 도구로 보는 것에도 반대하였고, 국민당이 국가를 최종 목적으로 보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전자는 국가를 부정하고, 후자는 개인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있지만, 둘 다 국가를 개인보다 중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그리고 둘 다 인권을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중간당파는 국가가 인권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권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고, 인민들에게 요구되는 의무 또한 자신들이 갖는 권리에 상응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렇듯 명백히 자유주의적이던 민맹의 정치적 성향이 항일 전쟁 승리 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민맹은 영미의 방식이나 소련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정치적 자유, 평등을 경제적 자유와 평등으로 확대 발전하거나, 소련의 경제 민주와 영미의 정치 민주의 결합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조의 발흥으로 민맹의 노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세계적 경제 위기가 도래했고, 이 시기 자유주의 국가들에서도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게 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런 배경에서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중간당파는 19세기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인식과 함께 소련식 사회주의의 폐단을 우려했고, 중국 내 경제적 불평등과 비민주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에 대한 국가의 제약을 인정하게 되었다. 

민맹은 계획경제와 자유경제를 결합시킨 “온화한 사회주의”를 지향했으며, 계획경제와 자유주의의 단점을 없애고 장점을 취하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간당파는 이렇게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절충과 타협을 추구하게 되었다. 국가의 기능이란 “인권을 보장하고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 인권에는 소극적 권리뿐만 아니라 적극적 권리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특히 적극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제약과 간섭을 인정한 것이다. 

중간당파는 인신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가장 기본적인 인권으로 보았으며, 그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보았다. 그러나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는 각국의 발전 수준에 의해 제약을 받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동일한 인권 보장을 받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인권의 특수성과 공간성을 인정한 것이다. 인신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기본적 권리로 보고,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를 그에 부수적인 권리라고 본 것이다.

인권의 종류와 그 상호 관계에 대해 중간당파는 개성의 발전에 대한 인신의 권리, 정치적 권리,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였다. 사회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도 중시했다. 그리고 자유권과 생존권을 중심으로 인권 보장 체계를 확립할 것을 주장했다. 장쥔마이는 중국의 인권 운동이 서구의 인권 사상처럼 개인의 자유에 치중해서도 안 되고, 사회주의처럼 사회적 권리와 집단적 권리에만 치중해서 개인의 자유를 간과해서도 안 되며, 양자를 하나로 합쳐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본권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민맹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타협을 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기본권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신체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이다.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3대 권리라고 생각되었다.

이 세 가지 권리는 선거와 관련 있는 것이었다. 민맹은 정치적, 법적, 사회적 자유와 평등이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조작됨으로써 선거가 그 진정한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고 보았던 만큼 그와 관련된 자유의 보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맥락에서 민맹은 국민당의 사상 통제, 언론 통제에 반대했고, 언론 출판의 자유가 중간당파 인권 운동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 중간당파는 언론의 자유를 민주 정치의 초석이며, “국가의 영혼, 사회의 생명”으로 여겼기 때문에 민주 국가라면 반드시 인민의 사상과 언론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전에는 절대 간섭받지 말아야 한다고 보고, 사후에는 법에 따라 간섭이 가능하다고 본 점은 일종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당은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 내에 더해 당 외 어떤 파벌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러 당과 당파가 존재했고, 국민당을 빼놓고 모두가 인민의 결사 또는 정당이 사회의 법치화에 유리하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첫째, 정치적 결사를 통해 인민이 집단적 방식으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각종 정치적 결사가 상호 의견 교류를 통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정치적 결사를 통해 민간의 지도적 정치인을 육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정치적 결사로 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민당을 제외한 나머지 당파의 결집을 결과했다. 이렇게 중국민주동맹, 즉 민맹이 결성된 것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인권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쑨원과 국민당이 상황적 강제로 인해 천부인권을 포기했듯이, 중간당파도 동일한 상황적 강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국민당과 같이 독재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중간당파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타협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절충적 인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론

근대 중국에서 자유주의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역사적·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그 당시의 주장이 지금도 유효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적 강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만 했던 권리가 결국은 권리 전반에 대한 침해를 결과한 것을 보면 오늘날 반복적인 위기의 도래에 직면해 있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학자인 그리더(Grieder)는 중국에서 자유주의가 실패한 이유가 자유주의자들이 역사적 기회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자유주의가 실패한 이유로 중국이 혼란에 처한 탓에 자유주의자들에게 질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자유주의가 실패한 이유가 자유주의가 가정하는 공동의 가치 기준이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유주의도 그러한 가치 기준을 만들어낼 수단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달리 말하여 중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중국인의 삶이 무력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자유주의는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가치 기준이 확립되었다고 보는 많은 서구 선진국들, 그리고 한국에서도 자유주의적 가치들은 언제나 위협받는다. 당시 자유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교육받지 못한 중국 인민들도 자유주의적 인권과 가치들이 좋다는 것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상황적 강제를 벗어날 수 없었을 뿐이다. 다시 오늘날 그러한 삶에 대한 전반적 위기와 도전이라는 상황적 강제가 도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자유인가 생존인가의 양자택일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리고 개인인가 국가인가의 선택에서도 우리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근대 중국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런 선택의 기로에서 개인, 자유, 민주를 양보하였을 때, 그것은 언제나 생존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다시 그런 문제가 우리에게 닥친다면, 민주적 경험이 풍부하고, 게다가 수십 년을 이미 민주적 분위기에서 살아왔으며, 주권 의식과 인권 의식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선택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인가 확신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가까운 과거, 아니 현재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위기 속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는가.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근대 동양에서의 자유: 민권과 국권 (김현주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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