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선배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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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배 되기
  • 황정운·전남대 물리교육과
  • 승인 2020.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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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교수 단상]

관계와 역할, 신임 교수로서 보냈던 나의 지난 한 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신임 교원 오리엔테이션과 첫 출근, 그리고 첫 강의, 이렇게 동기 및 선배 교수님들, 그리고 학생들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우리 학교에는 신입생들의 학교 적응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2학년 도우미 학생과 네다섯 명의 신입생들 그리고 한 명의 담당교수가 조를 이루어 한 학기 동안 진행된다. 학교 주변 맛집 탐방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장소에 견학을 하러 가기도 하면서 학교와 그 지역사회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 조 신입생들은 가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2학년 도우미 학생을 ‘선배님’이라고 불렀는데, 나 역시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도우미 학생을 선배님이라고 따라 불렀다. 당장 어디에서 밥을 사 먹어야 할지도 모르는 낯선 도시, 그리고 더 낯선 학교에 발붙이려는 나에게 2학년 선배님만큼 내 눈높이에서 실용적인 도움을 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낯선 도시 외에도 사범대라는 사회에는 자연대 출신인 나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것들이 있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교육 관련 교과목들, 임용시험 준비과정, 그리고 현직 교사인 대학원생들이 그러했다. 이 역시도 또 다른 작은 사회일 뿐이지만, 수년간 연구실과 그로부터 파생된 관계라는 작은 커뮤니티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순간들이 있었다. 첫 학기에 맡았던 대학원 수업은 사범대학답게도 양자역학 교육론이었다. 양자역학은 학부 때도, 대학원 때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수년간 공부하였지만 양자역학 교육론이라니, 거기다 수강생은 현직 중등 교사들이다. 교육경험이라고는 대학원생 때 했던 교육조교가 전부인 내가 현직 교사들 앞에서 교육론을 논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수많은 고민 끝에 양자역학 입문서를 함께 읽으며 일종의 독서 토론 시간을 가졌는데, 그 과정에서 현직 교사들의 교육자로서의 경험과 교육 철학 등 다양한 생각을 접했고 되레 내가 선배 교육자인 그분들에게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소외지역 어린 학생들의 삶을 바꾸고 싶어서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교육은 중등교육과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그렇다면 고등교육기관의 교육자로서 나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볼 작정이다.

신임교수로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었는데, 첫 수업을 준비할 때 학부 3학년 시절 열통계물리를 가르쳐주신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본인이 우리보다 물리를 더 잘 해서가 아니라 단지 먼저 배웠기 때문에 알려주는 것이라고. 공교롭게도 내가 맡은 과목 역시 열통계물리였고, 수업을 준비할 때마다 그 말씀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지금 학생들이 모르는 것은 예전의 나도 몰랐던 것이고, 학교를 조금 일찍 다닌 선배로서 먼저 배웠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권위 있는 교수님보다는 좋은 선생님, 좋은 선배가 되자고 다짐했다. 두 번째 학기에는 의도치 않게 일주일 내내 수업시간에 3학년 학생들을 만났다. 스스럼없이 연구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기 시작한 학생들을 보며 내가 학부 3학년 담임선생님이라고 동기 교수님들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적은 나이 차 덕분에 학생들이 나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나이 차가 적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생들이 좋아해 준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 내 나이가 많아졌을 땐 학생들이 나를 멀리할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곧 마음을 바꾸어 지금은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그들 보다 몇 년 앞서 비슷한 것을 경험한 선배로서 도움을 주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때그때 내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해주리라 결심했다. 언젠가는 나름 깨달은 바가 있는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줄 날도 오리라.

지난 일 년 동안 새로운 관계 속에서 나는 수많은 선배들을 만났고 가끔은 내가 선배가 되기도 하였다. 수년 전 나만큼이나 이 학교가 낯설었을 선배 교수님들이 들려주시는 경험담, 그리고 도움과 조언은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듯싶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따스함을 잊지 않고 시간이 흘러 그것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다.


황정운·전남대 물리교육과

서울대학교 물리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항공과대학교 물리학과와 UT Dallas 재료공학과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쳐 현재 전남대 물리교육과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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