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왕위계승방식 太子密建法의 원조는 페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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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왕위계승방식 太子密建法의 원조는 페르시아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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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8)_ 페르시아와 중국의 닮은꼴 문화


『조선왕조실록』(「성종실록」) 성종 14년 계묘(1483년) 8월 18일(무인)의 기사(아래쪽)를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중국 황제의 생일에 사신을 보내 축하하는 데 들고 간 貢物의 수량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건 진헌(進獻)한 물건 중에 페르시아(波斯)産이 네 가지나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하나는 진보파사進寶波斯로 노리개를 말한다. 또 하나 파사기린波斯麒麟은 3건이라 했으니 실존 동물인 페르시아 기린이 아니고, 기린 형상의 물건일 것이다. 약칭하여 ‘린(麟)’이라고 하는 기린은 본래 성인이 세상에 나오면 나타난다고 하는 고대 전설상의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로 사슴 형상에 머리에 뿔이 나 있고, 전신은 비늘로 덮여 있으며, 꼬리가 있다고 한다. 우리네가 흔히 기린이라고 부르는 목 긴 동물은 ‘장경록(長頸鹿, 목이 긴 사슴)’이라고 한다. 파사봉주波斯捧珠 또한 구슬 목걸이일 것으로 짐작된다. 나머지 한 가지 파사波斯 4건은 무엇인지는 확인이 안 된다. 아무튼, 상국의 황제의 생일에 맞춰 올리는 물건이니 진귀한 것일 테고, 문제는 물품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진상품 목록에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조선조 때 우리나라 섬유기술이 얼마나 대단했었나를 알 수 있어 기쁘기도 하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색색의 면주(綿紬)와 면포(綿布)를 보자. 면주는 명주(明紬)라고도 하는데 명주실로 무늬 없이 짠 피륙(천)을 가리키고, 면포는 무명이라고도 하며 무명실로 짠 천을 가리킨다. 이 천들을 천연염료로 자색, 녹색, 홍색, 황색, 다갈색, 유청색, 초록색, 수록색 물을 들였으니, 그 공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어느 곳에서인가 능라(綾羅)를 아청(鴉靑) 빛깔로 물을 들여 넓다듬이질을 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도대체 아청색은 어떤 빛깔이며 얼마나 아름다웠을 것인가? 또 견주와 견포도 있고, 마포에 저포도 있은즉, 조선 궁중의 호화로움이 지극했을 것이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樞府事) 한찬(韓?)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북경(北京)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게 하였는데, 백관들이 표문(表文)에 배례(拜禮)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따로 진헌한 물건은 다음과 같다. 자면주(紫綿紬) 30필, 녹면주(綠綿紬) 30필, 대홍면주(大紅綿紬) 20필, 황면주(黃綿紬) 20필, 다갈면주(茶褐綿紬) 25필, 유청면주(柳靑?紬) 25필, 초록면주(草綠綿紬) 20필, 수록면주(水綠綿紬) 10필, 자면포(紫?布) 20필, 녹면포(綠綿布) 20필, 대홍면포(大紅綿布) 20필, 황면포(黃綿布) 20필, 다갈면포(茶褐綿布) 20필, 유청면포(柳靑綿布)  저포 삼아(白苧布衫兒) 30건(件), 흑마포 삼아(黑麻布衫兒) 50건,...
진보파사(進寶波斯) 4건
파사(波斯) 4건
파사기린(波斯麒麟) 3건
파사봉주(波斯捧珠)

...쌍원(雙猿) 18개, 솨아(?兒) 21개, 어아(魚兒) 18개, 중소 호로(中小葫蘆) 각 18개, 와와(娃娃) 18개, 구아(鳩兒) 18개, 원앙(鴛鴦) 18개, 소아(梳鴉) 18개, 압아(鴨兒) 18개, 중소 합아(中小蛤兒) 각 18개, 가대아(茄袋兒) 18개, 능각아(菱角兒) 18개, 고아(苽兒) 18개, 침가아(針家兒) 18개, 표아(瓢兒) 22개, 장아(獐牙) 16개, 산양각(山羊角) 18개, 도아소아(桃牙銷兒) 18개, 낭아(囊兒) 18개, 섭아(?兒) 18개, 녹대포(鹿大脯) 15속(束), 녹편포(鹿片脯) 2백 개, 건문어(乾文魚) 2백 미(尾), 건대구어(乾大口魚) 3백 미, 건전복어(乾全鰒魚) 2백 속(束), 건오적어(乾烏賊魚) 8백 미, 건광어(乾廣魚) 2백 미, 건수어(乾秀魚) 2백 미, 곤포(昆布) 2백 근(斤), 탑사마(塔士麻) 2백 근, 해의(海衣) 1백 근, 해채이(海菜耳) 1백 근, 향점(香?) 1백 근, 홍소주(紅燒酒) 10병, 백소주(白小註) 10병, 송자(松子) 2백근, 인삼(人蔘) 50근이었다.(참고: http://blog.daum.net/mbk9198/15515276)

지난 글에서 야생 파가 나는 산을 ‘파미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했다. 필경 오래전 파미르에 살던 현지인들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작명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와 관련하여 비슷하지만 좀 색다른 상황을 그려보자.

▲ 파미르 고원의 유목민(사진 제공: KBS 장영주 피디)
▲ 파미르 고원의 유목민(사진 제공: KBS 장영주 피디)
▲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
▲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

어느 날 이방인이 어떤 강가에 이르러 근처에 사는 주민에게 “여기가 어디요? 혹은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이요?”라고 물었다. 서로 생김새도 다르지만,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언어로의 소통은 어려웠겠지만, 눈치로 질문이 무엇인지 파악한 현지인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신두(Sindhu)”. 이 말이 그 지역의 명칭이 되었고, 페르시아어로 Hindu로, 그리스어로 Indus로 전사되기에 이르렀다. Sindhu는 범어로 ‘江’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외지인이 강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묻는 것으로 판단한 현지인은 마땅히 “이건 강이오”라고 답했고, 외지인은 ‘신두’라는 말을 강의 명칭이나 일대의 지명이라고 받아들인 결과가 인도아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 명칭의 탄생을 본 것이다. 

▲ 파키스탄 주변의 신두(인더스) 강(출처: wikipedia)
▲ 파키스탄 주변의 신두(인더스) 강(출처: wikipedia)

파미르의 말뜻이 “세상의 지붕”이 아니고 “파의 산”이냐고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에도 산을 뜻하는 ‘메’와 ‘뫼’가 있다. ‘메’와 ‘뫼’는 ‘미르’와 다르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자이살메르, 카시미르에서 보는 ‘메르’와 ‘미르’가 다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사람이 오가며 물건이 따라붙고, 풍속이 퍼지고, 언어 접촉이 이뤄졌다. 둥근 알 모양의 구근(球根)이 달린 유럽산 파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 희한한 식물의 이름을 간단히 지었다. 서양 파니까 양파. 그렇게 해서 洋자가 붙은 말을 살펴보면 거의 모두가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다. 입성이 완전히 다른 서양 옷과 신발을 보고는 양복, 양장, 양화라고 하고, 양말(?), 양담배, 양주, 등등도 다 서양산을 가리킨다. 양공주나 양색시는 시대 상황에 대한 추가적 설명이 필요한 말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천산과 파미르 너머 서역에서 들어온 것은 胡자를 붙였다. 호도, 호숙(후추), 호밀, 호박. 호로 자식은 다르다.

우리 입장에서 중국과 관련된 것에는 唐자를 붙였다. 당면, 당근, 당삼채, 당황, 땅(<당)꼬마 등등. 당진(唐津)은 중국으로 가는 뱃나루다. 그런가 하면 탐진(耽津)은 탐라(耽羅,제주)행 뱃나루다. 탐진은 강진(康津)의 옛 지명이다.

▲ 건륭제
▲ 건륭제

여진족이 세운 나라 大淸帝國(1618~1924)의 황제 중 가장 행복했던 인물은 고종 건륭제(乾隆帝)다. 그는 선제인 옹정제(雍正帝) 13년(1735) 태자밀건법에 의해 황위에 오른 첫 번째 황제로 1737년부터 본격적으로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해 약 60년간, 이후 太上王으로 2년을 더 대륙의 지배자 노릇을 한다.

태자밀건법은 황제가 선정한 황태자의 이름이 적힌 친서를 건청궁(乾淸宮)에 걸린 청나라의 시조 황제 순치제(順治帝, 치세: 1643~1661)가 쓴 ‘正大光明’ 편액 뒤에 숨겨 두고 密旨는 內務府에 간직했다가 황제가 죽은 후에 개봉하여 밀지와 친서를 맞추게 하여 새 황제를 옹립하는 방식이다.

순치제는 後金의 제2대 칸이자 대청국의 창업 군주인 숭덕제(崇德帝)의 아홉 번째 아들이다. 숭덕은 청제국의 연호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 휘(諱)는 아이신 줘로 홍 타이지로, 후금(後金)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 奴兒哈赤)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만주족 이름인 홍타이지는 한문사료에 황태극(皇太極), 홍대시(紅?是), 홍대시(洪大時), 홍태극(洪太極), 홍태주(洪太主), 홍태시(洪?始), 홍태시(洪台時), 홍타실(洪他失) 등으로 표기되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異說만 분분하다.

태자밀건법은 서로 의심하고, 서로 욕심내고, 급기야 살육전에까지 이르는 권력에의 의지 내지 욕망에서 비롯되는 형제간 내분을 없애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선진제도라고 본다. 청나라는 일찌감치 서역 파사국에 그런 제도가 있었음을 알고 벤치마킹한 것은 아닐까?

▲ 광서 34년(1908년) 시기 청나라의 행정구분도
▲ 광서 34년(1908년) 시기 청나라의 행정구분도

파사국(波斯國)은 경사(京師)에서 서쪽으로 15,300리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토화라(吐火羅)와 강국(康國)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돌궐(突厥)의 가살부(可薩部)와 인접하고, 서북쪽으로는 불름(拂菻)에 도달하고, 정서(正西)쪽과 남쪽은 큰 바다에 임한다. 호구수는 10만이다. 그 나라 왕은 두 성에 거주하며, 큰 성이 10여 곳이 있으니 마치 중국의 이궁(離宮) 같았다. 그 나라 왕은 지위를 이어받은 초기에 곧바로 은밀히 아들 가운데 재주가 뛰어나 정통을 이을 수 있는 자를 선택하여 그의 이름을 써서 봉한 후 감추어 놓는다. 왕이 죽은 후 대신과 여러 아들들이 함께 봉한 부분을 뜯어서 그것을 보고는, 이름이 적혀있는 자를 받들어서 군주로 삼는다. (『舊唐書』 卷198 列傳 第148 西戎 波斯條)

얼마나 놀라운 우연의 일치인가! 동서로 1만5천3백리 떨어진 두 나라의 왕위계승방식이 닮은꼴이라는 사실이(『北史』에는 파사국이 代나라로부터 24,228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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