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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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이란 무엇인가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08.0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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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부동산 절세 세미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유명 생명보험 회사와 협업해서 증여세나 상속세 등을 절감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세미나를 홍보하는 전단의 한 귀퉁이에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명문 가문을 지키는 가장 큰 힘입니다.”라는 말이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절세 방법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세미나까지 열어서 알려 준다는 이야기도 그리 좋게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자리에서 ‘명문 가문’을 운운하기까지 한다니 한마디로 어불성설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이기에 ‘명문’이라는 말을 대놓고 써 놓은 것인지도 의문이거니와 그 이전에 정말 명문 가문이라고 자부하려면 오히려 세금을 더 정직하게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금을 합법적으로 절약하겠다는 것일 뿐 탈세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혹시라도 절세를 하기 위해 각종 편법을 동원하거나 한다면 그 또한 도의적인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편법을 알고 있다면 법의 미비점을 고쳐서 세금을 정직하게 낼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바로 명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절세 세미나까지 해 가면서 세금을 아끼겠다는 사람들 중에도 각종 기부 활동을 하면서 사회에 부를 환원한다는 사람이 더러 있을 수 있겠지만 세금이야말로 사회에 부를 환원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인 만큼 기본적인 것부터 착실히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나저나 ‘명문’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는 가문뿐만 아니라 학교에 대해서도 자주 쓰는 말이다. 예컨대 필자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한때 언론 매체에서 ‘신흥 명문고’라고 일컬었던 곳이다. 그런데 그 말은 다름이 아니라 유명 대학에 학생들을 많이 보내는 학교라는 뜻이었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학교에서 주목할 만한 대입 시험 성적을 내고 있으니 언론 보도까지 된 것이다. 하지만 입시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명문 소리를 듣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지금이야 개교한 지 반세기 가까이 되어서 졸업생 중에 여러 분야의 학술 연구자, 고위 공직자, 천주교 교구장 주교 등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배출됐으니 이제는 명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학교들 중 하나가 되지 않았겠냐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명문 학교라는 칭호는 그 학교 졸업생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어느 정도 생겼을 때에야 비로소 그 뜻에 걸맞게 붙일 수 있는 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지 대입 시험 성과만을 근거로 내세운 20여 년 전의 ‘신흥 명문고’라는 말은 때이른 감이 있지 않았는가 싶다. ‘명문 가문’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돈을 많이 벌어서 서울 강남의 신축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명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가를 이룬 가족들이 사회에서 값진 일을 많이 했을 때 명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문 가문을 지키는 가장 큰 힘은 절세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법을 자손에게 교육하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값비싼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남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명문을 자처하고자 한다면 그 태도를 더욱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안 그래도 서울 강남은 부동산 가격이 다른 지역보다 지나치게 높아서 사회적인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만큼, 이 지역 사람들이 지금처럼 이렇게 ‘절세’를 명목으로 세금을 어떻게든 적게 내겠다는 태도를 보이면 국가 공동체가 재정을 운영하는 데도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만한 재산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박탈감도 한층 더 커질 것이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귀감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사회 구성원들에게 박탈감을 가지게 한다면 누가 이들을 명문 가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국어 사전에 나와 있는 ‘명문’의 뜻풀이를 아래에 덧붙이고자 한다. 사전 뜻풀이라는 것이 늘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적어도 한국어 사용자들이 이 말을 어떤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여기에 나온 ‘훌륭하다’와 ‘좋다’라는 말의 뜻을 한 번쯤 새겨 보았으면 한다.

  <표준국어대사전> (1) 이름 있는 문벌. 또는 훌륭한 집안. (2) 이름난 좋은 학교.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 이름이 난 집안이나 학교
  한글학회 <우리말 사전> (1) 훌륭하다고 이름이 난 집안(=명가) (2) 이름 있는 학교, 또는 훌륭한 학교.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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