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화학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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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화학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6.28 0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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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 묻고 화학이 답하다: 시간과 경계를 넘나드는 종횡무진 화학 잡담 | 장홍제 지음 | 지상의책 | 280쪽

 

화학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약, 화장품, 세제 등 이미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화학 용품은 물론이고 화학 첨가물이 든 음식이나 플라스틱 제품처럼 아무리 피하거나 줄이려고 해도 늘 주변에서 발견하게 되는 화학 발전의 결과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인가 먹고 바르고 씻고 쓰고 버리는 순간순간, 화학 물질은 이미 우리 곁에서 혹은 우리 몸속에서 부지런히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세상 구석구석에서 화학의 흔적을 발견하는 화학자가 역사와 화학이 교차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제목과 어울리는 인문학적 시선으로 독특한 ‘하이브리드 과학서’이다. 고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펼쳤던 전술을 서술하며 산과 식초에 대한 상식을 풀어내는가 하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죽음을 납, 수은 등의 독성과 함께 심층적으로 다룬다. 연금술의 발달 과정, 성당 건물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유리의 특성, 화학무기 발전사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화학 속의 세상, 세상 속의 화학을 들여다보길 권하기도 한다.

서양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 렘브란트의 여러 작품 중 〈야경〉은 특별한 일화를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이 작품에 X선 형광 분석을 시도한 결과, 어둡게만 보이던 공간에 빼곡히 그려져 있던 밑그림이 나타났던 것이다. 렘브란트는 스케치를 할 때 골탄(bone black)을 사용하곤 했는데, 동물의 뼈를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고온으로 가열해 탄화시켜 만드는 골탄에는 인산 칼슘(CaPO4)이 함유되어 있었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야경〉을 대상으로 칼슘(calcium, Ca)과 인(phosphorus, P)에 대해 X선 형광 분석을 행했을 때, 비로소 숨어 있던 밑그림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강한 에너지의 X선으로 특정한 전자를 떼어내면 빈 공간이 생기고, 다른 전자가 이 공간을 차지하며 형광의 형태로 빛이 발생하는 원리에 대한 기술을 이 책은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시작한다.

화학자는 음악사 속에서도 화학의 자취를 찾아낸다. 저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죽음에서는 공통적으로 중금속 중독이라는 원인이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당시 흔히 약으로 쓰였던 독성 물질에 대해 알려준다. 모차르트가 안티모니에 중독되어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 이유, 싱크로트론 입자가속기의 분석을 통해 밝혀진 베토벤의 납 중독 등을 이야기하며, 역사가 품었던 비밀이 풀리는 과정에서 화학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한 예를 흥미롭게 제시한다.

 

화학이 문학이나 건축과 만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금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 그리고 연금술을 법적으로 금지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장에서 저자는 연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수많은 문학 작품과 게임 속에 드러나 있는 예를 함께 소개한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운 색깔과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건축에 대해 살펴보다가 광학적 현상이나 고체의 결정성, 냉각, 유리 제조 기술 등에 대한 설명으로 자연스레 넘어가기도 한다.

물론 책에서 저자가 펼쳐놓는 ‘화학 잡담’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역사의 뒷이야기와 화학의 발전에 대해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훑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서 화학을 발견하고 또 화학사를 통해 세상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있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예술사나 문화사뿐만 아니라 전쟁의 역사와 관련된 글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특히 전술이나 무기의 변화를 화학의 발전상과 함께 살펴보는 저자의 관점은 과학과 사회, 그리고 과학과 윤리의 관계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처형이나 암살에 이용되었던 독을 다룬 글 역시 다른 시대, 다른 사회에 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극을 보다 보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사약이 과연 어떤 성분으로 만들어진 약이었을지 한 번쯤 궁금해해본 독자라면 부자와 비상의 독성을 상세히 알려주는 저자의 분석적이고도 유머러스한 글에서 특별한 만족을 경험할 것이다. 한편 비상의 핵심 구성요소인 원소를 칭하는 비소는 현대 사회에서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유럽에서 17세기에는 남편을 죽이고 싶어 했던 여성들에 의해 이용되었는가 하면 19세기에는 보험금 상속을 노린 이들에 의해 쓰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역사 속에서 독성 물질의 쓰인 사례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독성 물질이 다른 시대, 다른 사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용되었는지도 들여다보게 된다.

저자는 증식 금지법((The Act Against Multipliers)과 연금술의 쇠락에 대해 서술하는 데에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1404년 영국 의회에서 통과된 증식 금지법은 연금술사들이 금이나 은을 만드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령이었다. 그 당시 흑사병, 수차례의 전쟁 등으로 인해 금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고 금이나 은의 증식을 법을 동원해서라도 막으려 했던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다. 탄압과 제약을 거치며 연금술사 혹은 초기 화학자들은 금이 아닌 의약품의 화학과 물질의 반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그들의 관심이 화학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연금술의 쇠락 및 화학의 발전을 매끄럽게 이어 설명하는 저자의 글은 인간이 물질과 원리를 이성적으로 들여다보게 된 또 하나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전달해준다.

역사보다 화학이 더 궁금한 독자들은 특히 각 장의 마무리 부분에 구성한 ‘종횡무진 화학 잡담’이라는 별면을 통해 더 깊이 있는 화학 지식을 접할 수 있다. 연금술에 대한 챕터에서 저자는 주기율표에서 금과 같은 족에 있는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하며 11족에 속한 금, 은, 구리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이후 ‘종횡무진 화학 잡담’ 코너에서 이 원소들을 다시 소환해 11족 원소 금속들의 색상, 전도성 등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정리한다. 또한 한니발의 알프스산맥 행군에서 식초가 쓰였을 가능성을 다루는 본문에서는 아세트산의 구성 요소와 옥텟 규칙에 대해 다루고 넘어간 후 다시 ‘종횡무진 화학 잡담’을 통해 최외각 전자와 양이온, 음이온의 탄생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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