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넥타이를 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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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넥타이를 자르고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2.06.26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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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에세이]

 

 (왼쪽 사진)백남준이 19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Performance of Etude for Piano Forte)'을 연주하다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모습. 사진: 클라우스 바리쉬(K. Barisch)
(오른쪽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총체 피아노>,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부퍼탈, 1963, 30.4×40.2cm, 사진: 백남준 아트센터

<나의 사랑 백남준>이라는, 그의 부인이 쓴 책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백남준이 젊었을 적에 공연장 손님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고 (미리 약속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바이올린을 끌고 다니고 피아노를 도끼로 내리치고 했는데, 이런 일들이 모두 예술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백남준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 우리 옆집 105호 아저씨가 했더라도 똑같이 인정 받았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부질 없는 것이, 옆집 아저씨는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었더라도 그럴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공연이, 또 그와 비슷한 전위 예술 행위들이 대단한 아이디어의 소산인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현실 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뻔뻔함과 똘끼도 물론 필요하겠다.  

백남준의 정신적 지주였던 존 케이지가 ‘4분 33초’라는 곡의 연주회에서 딱 그 시간 동안 피아노 앞에 앉았다가 퇴장하였는데, 이것도 현대 음악으로 인정받은 모양이다. 내가 그랬다간 몽둥이로 맞았겠지. 걱정할 필요 없다. 너에게는 아무도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을테니까. 평론가들은 그걸 보고 또 현대인의 고독과 실존의 고뇌와 은하계의 부조리를 잘 표현한 연주회였다고 설레발 풀었겠지. 그런데 그 연주회에서 청중들이 제멋대로 통화하고 껌을 씹고 아기는 울고 해도 그것도 예술 행위, 즉 참여 예술의 일부로 인정해 주었을까? 그건 또 못하게 했겠지? 왜 청중은 통제하고 공연자에게만 특권을 줄까? 현대 예술도 아직 거기까진 못 간 모양이다. 

마르셀 뒤샹이 시중에 나도는 변기에 자기 서명하고 전시한 유명한 ‘샘’이라는 작품이 있다. 다다이즘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같은 짓을 어느 무명 작가가 과연 실행할 수 있었을까? 주최측에서 거부했을 것임에 틀림 없다. 뒤샹도 처음에는 거절당했다는 것 같긴 한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아무튼 뒤샹이 이 작품으로 유명해진 것은 이런 전시를 강행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뒤샹을 밀어주는 자기 패거리들의 힘 말이다. (그런데 이 변기 전시도 사실은 엘사 폰 프레이탁-로링호벤이라는 여성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것이라고 한다.)

자기 똥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판매한 작가도 있는데, 참신한 아이디어다. 이것을 돈 주고 산 사람들은 우습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해프닝 등등 전위예술이라는 것이, 전통적이고 재래적인 게 답답하니 이것저것 해 보다 자기 나름대로 발악(?)을 해 보는 것인데, 그것도 다 받쳐주는 패거리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짓이 나서’ 이런 저런 짓들을 해 보는 것인데, 그걸 대단한 양 칭송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전통과 다르다고 배척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 중에서 미래의 예술 방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는 것도 있을 것이고, 그냥 재미나는 또는 혐오스런 짓거리로 사라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단지 나는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신기하다는 이유로, 또는 유명인이 한다는 이유로 칭송하거나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할 뿐이다. 그런 걸로 돈 벌어먹는 저명 작가들도 세상이 어차피 그러하니 그런 대로 이해해주자. 단지 어려운 여건에서 고군분투하는 가난한 무명 예술가들의 존재를 잊지 말고 그림 하나라도 사 주자. 술 한 번 안 마시면 된다. 

마지막, 사족으로, 나는 오래 전부터 자기 손가락 잘라서 전시하는 사람은 왜 없을까 궁금해 하고 있다. 아무리 전위라도 거기까진 못 가겠지.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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