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망언
상태바
올해의 망언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06.19 23: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원형 칼럼]

독일에서는 해마다 ‘올해의 망언(Unwort des Jahres)’을 선정한다. 언어학자 등 전문가로 이루어진 패널이 한 해 동안 독일에서 쓰인 어휘들 중 인권과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들을 심사해 그중 문제가 가장 심하다고 판단된 것을 ‘올해의 망언’으로 선정하는 것이다. 다만 연말이 아니라 연초에 그 이전 해의 망언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니 엄밀히 따지면 ‘작년의 망언’이라 할 수 있겠다. 즉 2022년 초에 ‘2021년의 망언’을 발표하는 것이다.

1991년부터 선정하기 시작한 이 ‘올해의 망언’ 가운데 몇 가지를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ㅇ 1991년(첫 선정): 외국인 없음(ausländerfrei). 반외국인 정서를 자극하는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슬로건.
ㅇ 2004년: 인적자본(Humankapital). 인간을 경제적 가치로만 재단하는 말.
ㅇ 2013년: 사회관광(Sozialtourismus). 독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마치 ‘독일의 사회복지 제도를 누리기 위해 관광을 온 사람’인 것처럼 묘사하는 말.
ㅇ 2015년: 착한 사람(Gutmensch). 독일의 다양성과 다문화주의 등을 지지하면서 난민을 지원하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경멸조로 지칭하는 말.
ㅇ 2019년: 기후 히스테리(Klimahysterie). 기후 변화 문제를 거론하는 이들을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 위해 지어 낸 말.
ㅇ 2020년: 코로나 독재(Corona-Diktatur). 코로나19에 대해 정부가 강력하게 대처하는 것을 독재라고 비난하기 위해 지어 낸 말.

유럽 사회의 최근 이슈를 반영하듯 인종차별과 관련된 어휘가 많이 보이는 가운데 2004년의 ‘인적자본(Humankapital)’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대통령의 발언 때문이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 자리에서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는 산업 인재 공급’이라면서 ‘핵심은 휴먼 캐피털’이라는 말까지 해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독일에서는 이미 금세기 초에 반인권적, 반민주적 어휘로 일찌감치 비판받은 말을 2022년 6월에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가 그것도 공식 석상에서 태연하게 입에 올린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현직 대통령만의 문제일까. 우리에게는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 독일에서 ‘인적자본’이라는 말을 ‘올해의 망언’으로 선정했던 바로 그 시기에 대한민국에서는 중앙정부 부처가 ‘인적자원’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정치인과 관료들이 소속 정당과 정치적 견해를 막론하고 교육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 왔는지를 드러내 보이는 부끄러운 이름이었다.

만일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올해의 망언’을 선정한다면 어떤 말을 꼽을 수 있을까. 사회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망언들이 쏟아져 나오는 실정이니 그중 어느 하나만을 꼽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여러 개를 후보로 선정하고 그중 하나를 선정하기로 한다면 선정된 어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후보들도 ‘올해의 망언’ 목록에 오를 만큼 반인권적, 반민주적 어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 테니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교수신문>에서는 해마다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학지성 In&Out>에서는 연말에 ‘올해의 망언’을 선정해 보는 것이 어떨까. <대학지성 In&Out>이 주도하고 전국의 비전임, 전임 교수들과 비전업, 전업 연구자 등 학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해서 해마다 ‘올해의 망언’을 선정했으면 한다. 독일처럼 해를 넘겨 발표하기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나 마지막 주에 ‘올해의 망언’을 발표한다면 이 사회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바로잡아 나가야 할지를 보여 주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