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의 시선으로 한국사상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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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의 시선으로 한국사상을 다시 본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6.19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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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벽의 사상사: 최제우에서 김수영까지, 문명전환기의 한국사상 | 김선희·허남진·박소정·허수·정혜정 외 6명 지음 | 창비 | 304쪽

 

근대 한국사상의 특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최근 우리 고유의 문명관이자 자생적인 변혁사상으로 재소환되고 있는 ‘개벽’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상사의 큰 줄기를 파악한 책이다. 그간 서구 담론에 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근대전환기 개벽사상을 소개하는 한편, 수운 최제우, 만해 한용운, 도산 안창호 등 널리 알려진 근현대 주요 사상가들을 개벽파의 시각에서 탐구했다. 

근래에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지상주의 같은 근대적 사유를 넘어서거나 민족적 경계의 안팎을 성찰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엮은이는 이러한 다원적인 근대성 논의로는 역사적 근대인 자본주의시대가 한반도의 삶에 발휘한 압도적인 힘을 제대로 인식하고 극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집필진은 우리 근현대 사상을 재구성하고 거기서 제대로 된 성찰과 변혁의 상상력을 끌어낼 핵심 주제로 ‘근대의 이중과제’와 ‘개벽’을 제시한다.

여기서 ‘이중과제’는 두 과제의 절충이나 선후 단계가 아니라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단일한 과제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근대에 적응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해가야 하는 우리 시대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이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과정임을 통찰하는 이중과제의 관점이 유용하다. 체계적 이론이라기보다 사유의 방법이나 분석의 틀이라 할 이 담론은 꼭 근대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상식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할뿐더러 역사적 경험 역시 그러하다.

한편 ‘개벽’은 한국 근현대사상이라는 특수한 대상에 접근할 고리다. 주로 구한말 토속 종교가 주창한 신비적 개념으로 여겨지곤 했던 이 말은 한국 근대라는 격동의 현실을 고려할 때 고통과 구체제를 종식하고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는 정치적 기획과 연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개벽은 변혁, 개혁, 전환과 같은 세속적이고 오늘날 활발히 활용되는 개념들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근현대사상의 넓은 시야와 변화의 전망을 잘 보여주는 용어라고 연구진은 판단한다.

이 책에서 소개된 사상가들은 종교, 철학, 정치, 문학 등 각자의 분야에서 자아와 사회뿐 아니라 세계로까지 시야를 넓혀 체계적 사유를 펼쳤다. 특히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백년의 변혁기에 부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독창적이고 변혁적인 사상을 내보였다. 외부 열강의 압력이 높아지던 19세기는 조선 말기의 혼란상에 지친 민중의 저항과 새 세상을 꿈꾸었던 변혁의 사상들이 움튼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작된 변혁의 사상은 식민지배와 독립, 분단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한반도 개벽파’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계보를 형성했다.

집필진은 개벽을 추구한 주요 사상가들의 체계를 설명하는 동시에 각 사상의 역사적 맥락을 탐구하고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규명하고자 했다. 여기 소개된 사상가들은 단지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했다. 

책의 1부는 혼란기인 조선 말기에 변혁을 꿈꾸며 새롭게 등장했던 사상가들을 만난다. 2부는 잘 알려진 근현대 한국사상의 거인들을 변혁의 시각에서 다시 해석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과 더 나은 나라만들기를 부단히 고민하고 성취하려 했던 사상가들의 시도가 소개된다. 

우리는 구한말 근대의 물결이 한반도까지 이르렀을 때 한반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개방’을 주장한 개화파와 ‘쇄국’을 주장한 위정척사파가 있었다고 가르치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는 기층민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한반도 주민으로 시야를 넓히지 못한 시각일 뿐 아니라, 근대를 오로지 외부의 압력에 의해 강제된 것으로 보는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개벽의 사상들은 우리 스스로 안과 밖의 모순을 극복하고 더 나은 가치가 실현되는 새 세상을 꿈꾸었다. 그 생각들은 외부의 충격에 매몰되지도, 그 위력을 간과하지도 않았으며, 내부의 과제를 단순화하지도, 거기에 갇히지도 않았다. 당면한 과제를 넓고 깊게 사유하면서도 변화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근대라는 과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주체적으로 만들어간 ‘적공’의 과정을 새롭게 탐색할 필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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