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그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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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그렇게 한다”
  •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 승인 2022.06.1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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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

2차 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회인식과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는 ‘근대화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그 이론은 세계를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선진적인 근대 나라들과 저발전과 비민주주의의 후진적인 전근대 또는 (듣게 좋게) ‘전통’ 나라들로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후진의 원인을 전통에서 찾는다. 신분 귀속적이고 특수한 기준들이 지배하며 기능적으로 미분화된 전통 사회에서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후진에서 선진으로의 ‘발전’의 처방은 전통을 타파하고 근대로 ‘도약’하는 것, 즉 ‘근대화’하는 것이다. ‘근대’의 본보기는 서구 나라들에 있으며 후진 나라들은 서구 나라들이 거쳐온 발전과정을 선진 나라들의 도움을 받아 (가능한 한 빠르고 강력하게) 진행하면 된다. 신생국들이 근대화를 통해 도달해야 할 선진 근대 나라의 절정이자 종점은 당연히 미국이다. 이런 ‘근대화’ 논리는 나라들 사이 뿐 아니라, 한 나라 내부에도 적용되어, 후진적인 전통적 부분이나 세력을 타파하고 근대적 부분이나 세력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근대화 이론은 미국의 사회과학자들이 만들고 전후 미국의 패권에 힘입어 세계를 지배했다. 그 이론 생산과 전도(傳道)의 배경에는 2차 대전 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들의 ‘자주적’ 발전 노력, 냉전의 맥락 속에서 소련의 지원에 의한 신생국들의 공산화 가능성 그리고 그에 따른 미국의 지배력 약화의 우려가 자리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신생국들의 원자재와 제조된 상품 시장의 전망이라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명령이 작동했다. 그 이론은 개인적 선택과 혁신을 위한 (물론 시장의) ‘자유’도 강조했고 그에 따라 ‘냉전 자유주의’라는 다른 이름도 얻었다. 

그렇지만 근대화 이론은, 그것의 전제 가정인 전통적인 것은 비합리적이고 근대적인 것 또는 서구적인 것은 선진적, 합리적이라는 ‘전통-근대의 이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허구이다. 사회들이 전통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단선적으로’ 발전한다는 주장도 ‘경험적’ 근거가 없는 독단이다. 오히려 그 이론은 제국의 식민 통치가 미개한 식민지를 ‘문명화’한다는 제국주의 침략 정당화 논리를 서구 나라들이 저발전의 전통 사회의 ‘근대화’를 돕는다고 포장만 바꾼 것이다. 

그럼에도, 근래 ‘이대남’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 사회과학에서는 부정확하고 왜곡된 주장이라도 (정치적, 경제적 힘에 얹혀) 유포되면 사람들의 인식에 수행적 힘으로 작용하고 사회세계를 구성하는 효과를 동반한다. 근대화 이론의 주장에 따라 전통적인 것 토종적인 것은 근절해야 하고, 근대적인 것 서구적인 것은 선망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것에 의해 근대화 이론은 미국에서는 공산주의 봉쇄와 자본주의 시장 지배를 위한 신생국들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개입을 옹호하고 (미국정부 경제학자 로스토의 『경제 성장의 단계』는 ‘반공산당 선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신생국들에서는 (전통적인 것들을 척결한다는 핑계의) 억압적 통치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이데올로기로 구실했다. 이점에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근대화 이론은 냉전의 열정에 과학적 신뢰성을 부여하고 매카시의 히스테리적 포퓰리즘적 반공주의를 사회과학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정치적 입장으로 전환한 이데올로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이 그렇게 한다”고 대통령이 오래 전에 숨은 근대화 이론의 유령을 불러냈다. “선진국 특히 미국 같은 나라에서 거버먼트 어토니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정·관계에 아주 폭넓게 진출하고 있다. 그게 법치국가”라는 계몽도 덧붙였다. 대통령의 사회과학적 인식 수준이 근대화 이론이 횡행하던 60~70년대 군부 권위주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악의적일 것이다. 시장에서 산낙지를 든 대통령, 축구경기장에서 훈장을 수여하는 대통령, 득세하는 검찰 윤석열 사단에서, 40~50년 전 농민과 막걸리 마시는 박정희, 축구경기장에서 시축하는 전두환, 신군부 하나회를 연상하는 것은 내 상상력이 빈곤한 탓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 악의를 자극하고 상상력을 제약하는 것은 그밖에도 많이 있다.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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