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필독서, '량치차오'의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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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필독서, '량치차오'의 대표작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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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음빙실자유서: 중국 근대사상의 별 량치차오梁啓超, 망명지 일본에서 동서 사상의 가교를 놓다(개정판) | 량치차오 지음 | 강중기, 노관범, 박근갑, 서광덕 외 9명 옮김 | 푸른역사 | 468쪽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대표작으로, 110년 만에 다시 우리말로 완역됐다.

중국 청나라에서 태어나 신학문에 눈을 뜬 량치차오는 스승 캉유웨이와 함께 근대화운동인 변법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뒤 1898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15년 동안 머물면서 그는 서양 사상을 왕성하게 섭취하며 동서 사상의 가교를 구상했는데, 이 과정에서 매체 기고 등을 목적으로 썼던 글들을 묶어 펴낸 책이 <음빙실자유서>다. 동양 지식인이 서양 근대 문명의 개념과 사상을 수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근대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이 책은 문명, 자유와 민주, 국권과 민권, 국민, 개혁을 향한 의지와 자세, 개혁의 방법과 이론 등 근대화에 관한 자기 생각을 서술했다. 영웅호걸과 위인, 부국강병, 군대, 무사도와 상무정신 등도 포함됐다. 이 글들에서는 서양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장점을 접하고, 중국이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기를 바라는 량치차오의 기대가 담겨 있다.

량치차오는 일반적으로 근대 중국 지식체계의 전환과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두가지로 평가할 수 있는데, 첫째는 서양 개념의 소개다. 문명과 야만, 자유와 민주, 국권과 민권, 국가와 국민, 군대, 법, 신문, 여론 등 근대 문명에 관한 기본 개념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서양 서적의 번역과 개념의 수입에는 다른 학자들도 기여했지만, 량치차오만큼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풍조를 연 인물은 드물었다.

둘째, 개념과 사상의 수입이 량치차오의 선택과 해석을 거쳤다는 점이다. 량치차오의 망명지에서의 단상을 통해 우리는 무술정변 이후 새 학문에 대한 중국 지식인의 갈망과 서학을 소화시켜 중국인의 ‘동학’으로 만들려는 고민과 흔적을 풍부히 살필 수 있다.

한국 근대 지식인 사이에서도 량치차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먼저 소개된 역사·전기류는 변법과 애국, 자강을 지향하는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후 량치차오의 문집과 자유서 등의 소품은 서양 사상의 핵심개념을 이해하고 국가 개혁의 방향과 관련해 많이 읽혔다. 그가 대중화될수록 찬반양론이 일었다.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음빙실문집』을 한문 교과서로 사용한 일은 유명하다. 안창호와 같은 계열에 있던 신지식인들은 ‘(상류 사람들의) 심성 개량의 속성과速成科’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한 지식인은 박은식과 장지연이었다. 박은식은 자신이 주필로 있던 학회지 『서우』에 연달아 소개했고, 장지연도 『대한자강회월보』와 『조양보』에 글을 알렸다. 구학을 지지하는 유학자들의 반대는 격심했다. 대한제국기의 큰 유학자였던 전우, 곽종석, 유인석 등이 모두 량치차오를 비판했다. 그들은 량치차오를 불교와 기독교를 섞어 쓴 이단이고, 왕도와 패도를 혼용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유인석은 『자유서』에 대해 “한 고조, 명 태조를 큰 도적이라 비난하고, 예악을 강압적인 제도라고 비판하는 등 고금에 들어보지 못한 괴이하고 패륜한 책자이므로 다시는 읽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이 책은 1903년 상하이 광지서국에서 처음 단행본으로 발간됐다. 이후 중국에서 1936년에 발간된 『음빙실합집』 2책에 몇몇 편이 추가로 발간됐다. 일본에서는 1904년 발간됐고, 한국에서는 1908년에 언해본이 발간됐다. 이번 번역은 1903년 발간된 광지서국본을 기본으로, 다섯 종류의 판본을 모두 비교하고 보충해 완역해 정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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