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조선시대 공무원들은 어떻게 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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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조선시대 공무원들은 어떻게 일했을까?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5.3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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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과거급제부터 은퇴까지 | 권기환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68쪽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공직사회의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다. 이는 국정 운영 이념과 행정조직이 완비되었다고 하더라도 역량 있는 인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정책을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조선이 단일 왕조로 500여 년간 존속할 있었던 까닭 중 하나도 우수한 인재들로 이루어진 관료체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조선의 양반’ 하면 떠올리는 백성들 위에 군림해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래로는 백성들을 살뜰히 돌보고 위로는 왕을 보좌하며 지금의 우리처럼 먹고살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생활인으로서 살아간 양반들의 또 다른 모습을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9 to 6는 꿈도 못 꾼다든가, 다른 부서에 업무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말싸움이 조직 전체의 싸움으로 커진다든가, 왕에게 결재를 받기 위해 적절한 타이밍을 노린다든가, 지방으로 발령을 받고 나서는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운다든가, 왕이 잘못된 정책을 펼치려고 하면 간언했다가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유배를 간다든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나랏일을 돌보는 와중에도 밤낮으로 자기개발을 하고, 좋은 근무 평가를 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인맥 관리에도 힘쓰는 등 일의 현장에서 겪고 느낀 것들을 생동감 있게 그려놓고 있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공무원이 인기 직종으로 각광받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놀랍게도 조선시대에는 공무원이 지금보다 더 높은 인기와 경쟁률을 자랑했다. 조선의 양반들은 양반가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영원히 양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4대조 내에 최소 말단직인 종9품직에라도 제수되어야 양반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양반들에게 과거 준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의 존속을 위한 생존 전략의 문제였다.

우리가 ‘양반’이라고 부르는, 사극에서 왕을 보필하며 정책을 토론하던 사람들이 바로 과거시험에 통과해 공무원이 된 이들이다. 많은 사람이 조선의 양반 하면 떠올리는 이이, 이황, 유성룡, 정약용, 김정희 등도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되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크게 정기시험과 부정기시험으로 나뉘었는데, 정기시험인 식년시는 3년마다 열렸으며 최종 합격 정원은 33명에 불과했다. 장원급제라고 하면 이 33명 중에서 1등을 가리킨다. 과거제는 공정한 절차에 따라 고급 인재를 선발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국가고시와 대학입학시험으로 그 명칭만 바뀌었을 뿐 기본 취지는 그대로 유지되어오고 있다.

 

오늘날의 고시제도가 수많은 ‘고시 낭인’을 양산했듯이, 조선시대에도 많은 ‘과거 낭인’이 있었다. 양반가 자제들은 보통 5세가 되면 『천자문』을 깨치는 것을 시작으로 평균 30년간 과거 준비에 매달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합격의 영광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500년이라는 조선 역사상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약 1만 5,000명에 불과했음이 이를 방증한다. 그 때문에 응시생들은 어떻게든 과거시험에 합격하고자 옷소매나 콧속에 커닝 페이퍼를 숨겨 시험장에 들어간다든가 하는 부정행위를 저지르거나, 시험관에게 뇌물을 주고 답안지를 조작하곤 했다. 때로는 시험장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잘할 수 있는 이를 고용하기도 했다. 경쟁률이 높아질수록 과거시험장은 온갖 비리로 얼룩졌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공정한 선발을 위해 응시생의 필적을 알아볼 수 없게끔 답안지를 옮겨 써 채점하거나 응시생의 자격 요건을 꼼꼼히 따지는 등 방안을 마련했으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가까스로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면신례’라고 불리는 신참 신고식을 치러야만 ‘진짜 관리’로 인정받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가혹행위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부모를 욕보이는 등 선배들의 온갖 수모를 50일 동안 이겨내야 했다는 점이다. 이이도 면신을 통과하지 못하고 낙향했을 정도로 고생했으며, 정약용 또한 선배들에게 밉보일까 자신의 행동을 구구절절 해명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힘겹게 공무원이 된 이들 중 일부는 초심을 잃고, 민심을 배반하고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 돈에 눈이 먼 관리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자신들의 곳간을 채워나갔다. 세종 대의 명재상으로 이름난 황희도 청탁의 대가로 뇌물을 받곤 했는데 그 때문에 ‘황금 대사헌’이라는 멸칭을 얻게 되었다.

지금과 달리 조선의 공무원들은 70세까지 일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소원은 70세에 명예롭게 퇴직하는 것이었다. 정쟁이 빈번했던 당시에는 4명 중에 1명이 귀양 갔을 만큼 정년을 채우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워 나라에서는 정년퇴임을 하는 관료에게 상을 내려줄 정도였다.

이 책은 단순히 조선시대 관료체제를 서술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직 공무원의 예리한 시선으로 공직이라는 세계가 어떻게 운영되어 조선 사회를 떠받치고 있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조선왕조에서 민주주의국가로 정체(政體)가 달라졌을 뿐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정책 결정은 그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왔다. 『효경』에서는 “천자에게 직언하는 신하 일곱이 있으면 비록 자신이 무도하더라도 천하를 잃지 않는다. 제후에게 직언하는 신하가 다섯 있으면 비록 자신이 무도하더라도 나라를 잃지 않는다. 대부에게 직언하는 가신 셋이 있으면 비록 자신이 무도하더라도 집안을 잃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면, 『춘추좌전』에서는 “나라의 쇠퇴는 공직자의 부적절한 행위 때문이며 공직자가 덕을 잃는 것은 [윗사람의] 총애와 뇌물을 탐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즉 옛사람들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공직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조선의 왕들은 덕치주의와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직자가 청렴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처벌만으로는 관리들의 비리를 척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 청백리 선발 제도를 두어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방지하고자 했다. 물론 관리들의 비행을 바로잡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조선 사회가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만큼은 여실히 보여준다. 율곡 이이가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한 자리가 벼슬아치라고 한 것도, 정약용이 공직자의 교본으로 평가받는 『목민심서』에서 “청렴은 수령의 본무요, 모든 선의 근원이며 덕의 바탕이다”라고 한 것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산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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