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제도 이면에 들끓는 권력욕과 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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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제도 이면에 들끓는 권력욕과 오판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5.22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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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 벤저민 카터 헷 지음 | 이선주 옮김 | 눌와 | 428쪽

 

“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바이마르 헌법 제1조가 규정했듯이 구(舊)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권은 분명 국민에게서 나왔다.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으며, 총선에서 비례대표제를 실행해 유권자의 민의를 보다 충실히 반영했다. 그 나라에서 최악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독일 국민에게만 책임을 묻는 건 지나치게 단순하다. 왜곡된 집단기억, 주류 정치권의 실책, 경제 위기, 반세계화·반민주 정서, 진영 갈등 등 국민이 분노하고 혼란에 빠져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던 다양한 요인이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쉬운 선택을 한 집단들의 무분별함과, 히틀러를 ‘간판’으로 앞세워 권력을 유지하려 한 기성 정치인의 오판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결코 집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1930년대 독일만의 일인가. 미국과 프랑스와 같이 자유민주주의가 굳건해 보였던 나라에서조차 오늘날 극우 민족주의·권위주의 등의 비민주적 가치를 앞세운 후보가 득세하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 역시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 권위주의를 실현했다. 민주주의는 왜 민주적으로 무너질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가 히틀러가 선택한 과거와 다시 끊임없이 대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 민주주의를 확립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벌어진 민주주의의 죽음을 국제 정세·법률·정치·경제·사회 영역을 아우르며 분석한다. 이를 위해 독일인이 경험한 주요 사건, 정치인들의 권력 투쟁의 막후를 당대인의 발언과 시선을 따라 또렷이 펼쳐 보인다. 거시사적 관점과 미시사적 관점을 오가는 이 책에서 우리는 제3자의 눈으로 민주주의 위기를 바라보는 한편, 당사자의 입장에서 뼈아픈 반성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패전 원인을 둘러싼 집단기억 왜곡과 전쟁배상금 등의 전쟁 후유증은 당시 국정에 참여하는 최대 정당이자 민주주의 성향이었던 사회민주당과 민주주의 공화국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전쟁배상금과 금본위제의 모습으로 찾아온 국제 질서, 무역과 경제·난민 위기로 찾아온 세계화는 이에 분노하는 이들이 곧 자유민주주의의 적대자가 되도록 내몰았다. 민주적인 정치인들은 국제 질서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었기 때문에 국제 질서와 세계화의 부정적인 여파는 곧 민주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최악의 패전, 증오 대상이던 강화조약과 세계 질서. 바이마르 민주주의는 위태로운 토대에서 시작되었다. 사회민주당은 패전 후 방위비 지출에 반대하고, 임금 인상 합의를 국가가 중재하는 제도를 시행시켰다. 그렇지만 군대는 무기 구매 비용을 더 확보하고 싶었다. 대기업은 임금 중재 제도를 철폐하고 노조를 약화시키고 싶었다. 당시 독일에서 강력한 두 집단이었던 군대와 대기업은 자신들의 의제가 선거에서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권위주의에 답을 찾고 똑같은 실현 방법을 들먹였다. 사회민주당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었다.

한편 농민들은 세계적인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인해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파산하기도 하고 있었다. 도시 노동자가 핵심 지지층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농민들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농산물 수입을 부추기는 무역협상으로 불붙던 증오를 부채질했다. 농산물 수입과 무역 협상이 독일 농업을 파산시킨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이후 사회민주당의 적대자이자 나치를 선택한 가장 열성적인 유권자가 된다.

히틀러는 독일에 산재한 어지러운 문제들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연설로 보여주며 성장했다. 1928년에 2.6% 득표했던 군소정당 나치는 히틀러가 총리가 되기 직전 해인 1932년 총선에서는 제1당이 되었다. 그렇지만 히틀러가 총리가 되는 데에는 국민의 지지뿐만 아니라 집권 우파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 프란츠 폰 파펜 등의 기성 보수 정치인들이 오판하지 않았다면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30년대부터 이들이 대통령의 총리 임명권과 비상명령을 이용해, 의회 다수당 지도자가 아닌 자신들이 간택한 사람들을 총리로 세우며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던 집권 우파 정치인들은 변변찮은 세관원의 아들이었던 히틀러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히틀러는 그들 눈에 국가지도자를 해낼 인물은 아니었다. 제1당인 나치가 대통령 탄핵·내란을 들먹이는데 협력할 다른 정당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도, 자신들이 히틀러의 선동가 재능과 추종자들을 이용하고 꼼짝 못 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1933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 임명한다. 히틀러 정권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조건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성 보수 정치인들의 오판과 오만함과 함께 출범했다. 이 책은 집권 우파 개개인의 선택과 이들의 이합집산을 그리며 기성 정치인의 사적인 목표와 특성, 오판이 한 나라의 정치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다.

히틀러의 과격한 언사를 모두가 알았지만 1933년 집권 직후에는 유권자의 표를 구하던 때와는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내각에서 11명의 장관 중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자리는 여전히 기성 보수 정치인들이 차지했고, 대통령·군대가 있으니 히틀러가 경거망동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국회의사당 화재를 빌미로 언론·집회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단번에 없애기 시작했고, 국회의 입법권을 정부에 위임하는 수권법을 통과시키게 해 권력을 거침없이 장악하기 시작한다.

이에 용기 있게 맞선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나치가 히틀러 반대 세력을 숙청한 ‘장검의 밤’ 사건에서 살해당하거나 체포당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는 본보기가 되어 후일 저항 세력을 나타나게 했다.

이 책은 ‘현대적인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어떻게 그렇게 민주주의가 급격히 무너졌는지’라는 질문에 답하며 그 복잡한 맥락을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여러 집단·개인의 선택과 목소리를 살피며 민주주의자와 반민주주의자, 세계주의자와 반세계주의자의 분열은 물론, 사회계층·지역·종교 민족 등으로 나라 전체가 뿌리 깊게 분열해 히틀러밖에 선택하지 못하고 독재정권의 야만을 막아내지 못한 한 나라를 그려낸다.

그렇다면 바이마르 민주주의 붕괴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저자는 “배타적인 음모론과 비합리성에 치우치는 문화 속에서, 거대한 반정부 운동이 엘리트들의 복잡한 이기주의와 결합한 결과”라고 짚는다.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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