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고증과 사실적 기록에 입각한 조선시대 전염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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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고증과 사실적 기록에 입각한 조선시대 전염병의 역사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5.22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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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 속 전염병: 왕실의 운명과 백성의 인생을 뒤흔든 치명적인 흔적 |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388쪽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전염병은 끊임없이 찾아와 왕실의 운명과 백성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향약집성방』, 『동의보감』, 『마과회통』 등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서를 넘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객관적인 기록서, 『양아록』, 『미암일기』, 『이향견문록』 등 개인적인 삶이 묻어 있는 다양한 일기와 문집까지 우리 역사 곳곳에 전염병의 흔적이 있다. 전염병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 또한 사회적 격리, 의학적인 방법의 동원, 의료인 양성, 전염병 발생 지역에 대한 국가적 지원 등 현재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어 놀랍기도 하고 지금만큼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안타깝기도 하다. 이 책은 철저한 고증과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여 조선시대 전염병의 모든 것을 한 권에 담았다.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유행하면 기본적으로 격리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양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일단 환자나 시체를 도성 밖으로 추방했다. 성 밖에서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전담하던 곳은 활인서였고 의원과 무당을 배치했다. 이때 무당은 ‘의무’라고 하여 의술을 행하는 무당이었다. 활인서에서는 약물 치료보다는 죽 등의 음식물을 공급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귀신을 겁주어서 쫓아내는 방법도 동원되었다. 무당이 나서 굿을 통해 몸에 악귀가 붙지 않도록 부채와 방울도 흔들고 장구도 치곤 했다.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하는 역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제가 상시적 또는 임시적으로 진행되었고 전염병이 발생하면 왕은 자신의 덕이 부족한 탓으로 자책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전염병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당시 미신에 기댔던 것이기도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의학적 치료를 넘어 백성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방편이었다.

의서를 편찬하는 일은 국가적 사업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약재를 활용한 모든 방법을 수집하여 제시한 《향약집성방》, 구하기 어려운 약보다는 침과 뜸을 통해 손쉽게 치료하도록 한 《침경요결》 등 그 당시 의서는 절박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집대성한 의서는 단연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처음부터 국가의 지대한 관심에 따라 대규모로 기획되었다. 《동의보감》의 핵심은 병을 고치기에 앞서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예방을 중시했다는 것,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조선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썼다는 것, 당대의 모든 의학 정보를 체계적으로 찾기 쉽게 뛰어난 방식으로 편집했다는 것과 같이 실질적인 것들이다. 

한편 아무리 몸이 아픈 상황이라 해도 성별이 다른 사람에게 몸의 일부를 내보이는 것이 부담이 되었던 시대에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의녀 제도를 마련했다. 의녀 교육은 혜민국에서 담당했으며 매월 성적을 매겨 세 번 불통한 자는 좌천시키고 다시 기회를 주어 조건을 충족하면 복귀시키는 등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의녀라면 기본적인 의학 지식 이외에도 진맥, 침과 뜸, 약 등 각각의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었던 점도 흥미롭다.

16세기를 살아간 조선의 선비 이문건이 직접 손자를 기르며 그 자라나는 모습을 기록한 《양아록》에는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으로 고생한 손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문건은 가장 먼저 노비 소근손이 걸린 데 이어 억복, 귀손녀, 아지, 만성, 숙녀, 유복 등 대부분의 식솔들이 감염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 당시 천연두의 전파력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마과회통》을 집필하기도 했던 정약용은 본인도 천연두를 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 6남 3녀 중 4남 2녀를 전염병으로 잃었다. 정약용이 막내아들 농아를 매장하면서 쓴 〈농아의 광지〉에는 전염병으로 자식을 잃은 심정이 슬프면서도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천연두는 조선 후기에 와서 특히 성행했다. 그 시대 관리들의 초상화 화첩인 《진신화상첩》 속 22명의 초상화 중 5명의 얼굴에서 선명한 곰보자국을 확인할 수 있다. 고위직을 지낸 관리들 상당수가 곰보였다는 사실에서 당시 관리들보다 열악한 환경의 백성들이 천연두로 크게 고생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천연두는 백성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고통을 주었다. 특히 천연두가 두드러지는 시기는 현종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대다.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 2년에 걸쳐 지속된 대기근을 경신대기근이라 일컬을 정도로 현종 시대는 유독 질병과 기근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현종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기근과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정치적으로는 예송논쟁에 휘말리며 잔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결국 30대 초반의 나이로 단명한다. 현종의 뒤를 이어 숙종이 즉위한 후에도 천연두는 극성을 부렸다. 숙종은 천연두로 왕비였던 인경왕후를 잃었으며 숙종 자신도 천연두에 걸려 고생을 했다. 숙종은 천연두의 위기를 잘 넘기고 회복되었지만 그 여파로 어머니 명성왕후도 잃게 되었다. 숙종 시대 이후에도 조선에 유행한 천연두는 왕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홍역을 치뤘다’, ‘학을 뗐다’, ‘에이, 염병할 놈’ 등 그 옛날 전염병의 지긋지긋한 기억을 담은 말들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전염병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모든 조건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전염병을 극복해 나간 역사는 코로나19 시대 우리에게도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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