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변천 … 중국과 한국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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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변천 … 중국과 한국 ⑧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2.05.2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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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역사 이해의 요체는 시대구분이다. 중국과 한국의 관계를 동아시아사의 시대구분에 따라 논의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사는 아주 크게 살피면, 문명권의 중심부인 중국, 중간부인 한국, 주변부인 일본이 발전의 주도권을 차례대로 가지면서 전개되어왔다. 

중세 전기까지의 역사는 중국이 주도했다. 중세후기는 한국이 대두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다른 장기를 보여주면서 경쟁했다. 근대는 일본이 앞서서 횡포를 부린 시대이다. 이제 근대가 종말에 이르러, 주도권의 행방이 달라지고 있다. 

중세전기까지의 상황을 살펴보자. 원시시대에는 서로 대등하다가, 중국이 고대문명 발전에서 앞서서 찬란한 업적을 이룩했다. 진나라에 이어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유럽의 로마제국과 함께 고대 자기중심주의에 머무르고, 중세 보편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  

높이 올라가면 내려오게 마련일 때에, 북방민족의 요ㆍ금ㆍ원나라가 중국을 무너뜨려 원기를 상실하게 했다. 남송은 북송의 유산을 힘겹게 잇다가 망하고, 새 시대로 나아가는 활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자 한국ㆍ월남ㆍ일본이 일어나 중세보편주의를 독자적으로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역사를 쇄신했다. 그 동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중국을 앞지르고 있다.  
 
시대가 달라진 양상을 문학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이 동아시아 전역의 고전으로 높이 평가된 것은 중세전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당(唐)과 병칭되는 송(宋)은 북송이다. 북송의 소식(蘇軾)이 한 시대를 마감하는 최후의 대가였다. 남송에는 널리 알려지고 평가되는 시인이 없었다. 나라가 쭈그러들기 전에 문화 역량에서 뒤로 물러났다. 

중세후기가 되자 중국의 지배민족인 한족은 문학 창조를 선도하는 능력을 잃었다. 그 대신 금나라의 원호문(元好問), 요ㆍ금ㆍ원나라에 걸쳐 있는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새 시대의 선두주자로 등장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나 월남의 완채(阮廌, 응우엔 짜이)가 문학사의 진행 방향을 더욱 분명하게 했다. 한문학이 민족과 민중의 문학이게 해서, 중세 보편주의를 독자적으로 구현하는 중세후기의 지표를 아주 실감나게 구현했다. 

중세전기와 중세후기는 집권세력이 달랐다. 중세전기는 토지를 독점하고 군사력을 장악한 대귀족이 특권을 상속하는 사회였다. 그 때문에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사태를 바로잡으려면, 참신한 인재가 과거를 통해서 진출해 국정을 담당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중소지주 지식인 사대부가 등장해 중세전기와는 다른 시대 중세후기를 만들었다. 

북송은 중세전기를 완성하고 중세후기로의 전환을 담당하고자 해서, 미완의 과제를 많이 남겼다. 요ㆍ금ㆍ원나라는 뛰어난 군사력으로 중세전기의 파괴자 노릇을 충실하게 하기나 하고, 중세후기의 건설자가 되기에는 지적 역량이 부족했다. 원나라의 주인인 몽골군이 멀리까지 가서, 이슬람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까지 뒤흔들어 중세전기 청산이 일제히 이루어지게 한 것이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몽골군은 어디서도 중세후기의 건설자일 수는 없었다.  

북송이 남긴 과제를 맡아 중세후기를 이룩하는 과업 수행에서 한국이 앞섰다.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위태로워진 주권을 정신적 활동으로 지키는 임무를 맡고 등장한 사대부가 조선왕조를 뜻하는 대로 건설해, 중세 보편주의의 독자적 구현을 이룩하는 모범을 보였다. 월남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 사대부의 지적 능력으로 다방면의 발전을 이룩했다. 대귀족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정권 참여자를 확대하는 변혁을 일본에서도 이룩했다.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한국에서 탁월한 식견을 가진 사대부가 새로운 시대를 모범이 되게 창조했다. 중심부가 창조력을 잃어 쇠퇴할 위기에 이른 유교문명을 신유학의 견지에서 소생시켜 오랜 이상이 현실이게 했다. 동아시아의 공유재산인 문명의 정수를 민족문화의 저력과 연결시켜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구체적인 과업으로 삼았다.   

나라의 주인이 통치자가 아닌 백성이라고 하는 민본(民本)의 이념을 분명하게 정립하고 현실 정치에서 실행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도 그래서 나온 업적이다. 문인이 무인을 통솔해 횡포를 방지하고, 글공부의 가치를 높여 가치관을 바로잡았다. 군인의 수를 최대한 줄여, 농민이 부담하는 세금이 과중하지 않게 했다. 농업 생산력 향상에 힘을 기울여 민생을 안정시켰다. 기술 발전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는 한국은 문화, 일본은 경제의 선진을 아주 다르게 보여주었다. 근대에 경제력을 지닌 일본이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강자로 등장해 동아시아의 이웃을 괴롭혔다. 이제 그 시대가 청산되고, 역전이 다시 일어난다. 중세후기까지도 뒤떨어져 있던 문명권의 주변부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에서 이룩한 중세후기의 성취물을 대거 탈취해갔다. 신유학에서부터 목판 인쇄술, 도자기 제조술까지 그 목록이 다채롭다. 그 모든 것이 일본의 발전을 위해 적극 활용되었다. 탈취해간 기술로 도자기를 탐나게 만들어 멀리까지 수출한 데서 일본인의 남다른 재간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탓에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집권자가 교체되었으나, 조선왕조는 그대로 남았다. 조선왕조를 아주 잘 만든 행운이 시대 변화에 뒤떨어지는 불운이 되었다. 중세는 신뢰를 잃고 근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오랜 기간 동안, 한국과 일본은 각기 다른 장기를 가지고 대조가 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은 민간에서 하는 학문과 예술의 창조에서 중세를 결산하고 근대를 설계하는 진전을 이룩했다. 특히 철학이 높이 평가해야 할 경지에 이르렀다. 일본은 상업의 발달로 자본을 축적하고 도시가 번영하는 길로 나아갔다. 대도시의 인구가 백만 이상이나 되어 세계에서 으뜸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선진이 반대가 되고, 그 이면의 후진도 반대가 되어, 양면을 아울러 평가하면 대등했다. 

이행기를 끝내고 근대로 들어설 때에는, 경제력을 축적한 일본이 앞서서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 침략의 술책을 배워 한국과 중국을 괴롭혔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다음에도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동아시아의 근대는 일본의 시대이게 했다. 그 상황은 누구나 알고 있어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 근대가 종말에 이르면서 일본의 선진은 후진이 되고 있다. 한일 역전이 다각도로 이루어져, 한국이 근대 다음 시대를 앞서서 이룩한다. 일본의 수입학을 한국의 창조학으로 뒤집는 학문의 역전이 특히 두드러져, 일본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이런 글을 한국에서 쓴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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