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공간-이동의 불협/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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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공간-이동의 불협/화음
  • 오태영 동국대 WISE캠퍼스
  • 승인 2022.05.1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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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잔여와 잉여: 근현대소설의 공간 재편과 이동』 (오태영 지음, 소명출판, 512쪽, 2022. 03)

 

한국 근대 최초의 장편소설로 평가 받고 있는 이광수의 『무정』에서 식민지 조선인 청년 이형식의 이동은 자기의 내면을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계몽적(낭만적, 민족적) 주체로서 자기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전근대적인 가치와 질서, 상징체계와 결별해야 했고, 평양으로의 이동이라는 공간적 실천 행위를 통해 이를 수행한다. 또한, 삼랑진 수해 현장에서 무지하고 미개한 조선인들의 참상을 목도한 뒤 그들에게 생활의 근거인 힘과 지식을 주기 위해 과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자신의 유학이 바로 이 식민지 조선 문명화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의미 부여한다. 이처럼 낡은 도덕의 구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명의 세계로 진입하는 식민지 조선인 청년들의 서사는 제국-식민지 체제의 식민주의를 뒷받침하는 문명화의 논리에 기대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 청년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하고 동일시하려고 했던 욕망은 제국-식민지 체제가 마련한 이동의 문법·장치·형식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 책은 제국-식민지 체제에서 냉전-분단 체제에 이르기까지 체제 변동 과정 속에서 한국의 공간 질서가 재편되고, 그러한 재편된 공간 질서 속에서 이동하는 주체의 행위와 욕망에 관심을 두었다. 1910년 한일병합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근대 한국은 1930년대 이후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지역으로의 지리적·문화적 팽창 과정 속에서 ‘외지(外地) 식민지 지방’으로서의 위상을 보다 강제 받았고, 이후 식민지 말 전시총동원 체제기 전쟁 수행을 위한 동원의 논리 아래 병참기지로서 재정위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제국 일본의 패전과 식민지 조선의 해방이라는 사건은 이와 같은 제국-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낳았다. 이후 탈식민화의 기치와 민족국가 건설의 움직임 속에서 해방 조선은 새로운 공간 질서를 구축해갔지만, 미소군의 남북한 분할 점령과 통치, 1948년 단독정부의 수립을 통해 38선을 경계선으로 하는 적대적 이념 공간을 창출했다. 이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 세계적 냉전 질서 하 남북한 분단 체제의 고착화로 이어졌고, 한반도를 양분하는 적대적 이념 공간 질서의 강고화를 낳았다.

이러한 체제 변동과 공간 질서의 재편 과정 속에서 개인들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이동은 자아를 넘어 세계를 인식하고 감각하며, ‘세계 속의 존재로서 나’를 구축하기 위한 핵심적인 방편이었다. 『무정』에서의 이형식과 이후 근현대소설에서 그의 후예들이 아로새기고 있는 발자취의 핵심에 바로 그와 같은 이동의 수행적 과정이 서사화되어 있다. 문명개화의 사명을 가지고 근대를 선취한 서양으로 향했던 조선의 청년들,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농촌운동에 투신했던 청년들, 제국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되었던 식민지 조선인들, 해방의 감격 속에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귀환하고자 했던 조선인들, 좌우익의 이념공간의 대립 속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던 해방 청년들, 한국전쟁의 시공 속에서 생존을 위해 월남하거나 피난길에 올랐던 이름 없는 자들, 전후 폐허의 절망과 재건의 움직임 속에서 처절한 삶의 흔적을 남긴 자들, 그런가 하면 전후 일본사회에서 차별과 멸시의 대상으로 배제되면서 남북한과 일본 그 어느 곳에도 자기 장소를 갖지 못했던 재일조선인들, 그들은 모두는 체제 변동과 공간 질서의 재편 과정 속에서 불안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면서 부단히 움직였다.

그때 체제의 실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공간의 재편과 경계의 구획은 개인들의 이동의 조건과 문법, 형식들을 창출하였다. 제국-식민지 체제하 근대 한국은 상호 연루되어 있으면서도 위계화된 차별적 구조를 갖는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방으로 위치 지어졌고, 탈식민-냉전 체제하 해방 조선은 전 세계적 냉전 질서가 형성되어가는 가운데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 질서 아래 포섭되었으며, 냉전-분단 체제하 남한사회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허와 재건의 논리 속에서 남성 동성사회적 공간으로 점철된 반공국가로 일신했다. 그리하여 개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관통한 공간 질서 속에서 자기의 존재 방식을 모색하고, 삶의 조건들을 마련하였으며,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이동했다. 하지만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체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바로 그 체제의 실정성에 포섭되거나 순응하는 한편, 일탈하거나 저항하기도 하였다. 개인들은 체제 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기도 하지만 체제 밖 불안정한 삶 속으로 자신을 투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체제 내 정주의 욕망과 체제 밖 이동의 욕망은 그 심급을 달리하면서 개인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근현대소설에 나타난 공간 재편과 이동하는 주체의 수행적 과정이 이목을 끈다. 문학은 체제의 질서와 문법이 마련한 인간 삶의 조건들이나 재편된 공간 질서가 구획한 경계들이 갖는 상징질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서사 형식으로서 소설은 서사성 구축 과정에서 체제의 실정성이나 공간 권력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체제와 공간 질서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자기를 재정립하기 위해 부단히 이동하는 주체의 분열과 불안의 흔적들을 산포시키는 한편, 이동 과정의 비가시화·축약·과잉 등을 통해 통제와 금기, 억압과 배제의 경계 긋기에 대해 소설은 서사적으로 응수한다. 그것은 정책과 제도, 도덕과 관습이 정당화하거나 권위를 부여하는 이동의 조건과 문법, 형식들을 비판적으로 재인식하게 하고, 나아가 새로운 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설들에서 이동하는 개인들의 행위와 욕망을 통해 근대 이후 체제 변동과 공간 재편 과정 속에서 이동했던 개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둘러싼 공간 질서를 내면화하면서도 경계 너머를 꿈꾸고 욕망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이동하는 주체들 중 제국의 잔여이자 국민국가의 잉여로서 존재했던 ‘벌거벗은 신체들’에 보다 관심을 두고자 했다. 식민지 말 전시총동원 체제하 제국 일본의 군인으로 동원되자 내선일체 담론을 전유해 자신의 제한적·폐쇄적 위상을 탈각하고자 한 식민지 조선인, 해방 조선의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민족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귀환을 달성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귀환할 수 없었던 자, 좌우익의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38선 월경의 행위가 사상의 선택으로 귀결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지극히 사적인 욕망에 이끌려 38선을 넘은 자, 한국전쟁으로 인한 실제적·상징적 남성성의 위축 속에서 사회에 나가 경제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펼쳐보였던 여성들, 전후 일본사회의 구조적 차별 속에서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도 인간 그 자체로 살기를 갈망했던 재일조선인, 그들은 모두 제국과 식민지, 국가와 민족, 남북한과 일본 그 사이의 공간을 넘나들면서 경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근현대소설을 통해 제국-식민지 체제기에서 냉전-분단 체제기에 이르기까지 체제 변동 과정에 따른 공간 재편과 경계 구획, 그리고 이동하는 주체의 수행적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 이 책은 여러 한계를 갖는다. 무엇보다 이동의 조건과 문법, 형식들을 마련하는 체제 변동 과정에 글로벌-리저널-로컬 단위의 공간 재편 및 경계 구획이 상호 연동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근대 이후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세계 질서 하 개인의 이동이 갖는 다채로운 의미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들이 이동의 과정을 수행하면서 자기를 재구축하는 과정을 보다 세밀하게 고찰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동의 회로와 양상, 그리고 거기에 나타난 욕망의 지점들을 구명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재편된 공간과 구획된 경계 속에서 동요하거나 분열하는 주체들, 탈경계와 월경의 욕망을 신체에 각인해 그 자체로 혼종성을 체현한 자들의 자기 서사에 대한 면밀한 탐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과문한 필자의 다음 과제로 남는다.


오태영 동국대 WISE캠퍼스·현대소설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웹문예학과 조교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식민지 말 문학자·지식인들의 동아시아 지역에 관한 공간 인식 및 경계 감각을 고찰하여 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최근에는 한국문학에 나타난 경계 구획 및 월경자(越境者) 표상이 갖는 대항 헤게모니적 실천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주요 저서에 『오이디푸스의 눈―식민지 조선문학과 동아시아의 지리적 상상』, 『팰럼시스트 위의 흔적들―식민지 조선문학과 해방기 민족문학의 지층들』, 『재일조선인 자기서사의 문화지리』 Ⅰ·Ⅱ(공저), 『접경 공간의 형성』(공저), 『마이너리티 아이콘』(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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