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열악한 감옥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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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열악한 감옥 환경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2.05.1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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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옥중에서 자행되는 가혹행위

사회고발 소설 『활지옥(活地獄)』이 폭로하듯이 청나라 말기의 감옥은 각종 불법과 비리가 만연한 생지옥과 같았다. 그런데 조선의 감옥 사정도 이와 별반 다름이 없었음을 우리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죄를 지어 감옥에 갈 경우 옥중에서 대개 온갖 고통을 겪게 되는데, 다산은 이 중 큰 것으로 형틀에 매이는 고통, 토색질 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갇혀 있는 고통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옥졸은 스스로 신장(神將)이라고 부르고 오래 묵은 죄수는 마왕(魔王)이라 자칭하며 죄수들을 괴롭혔는데, 특히 옥졸과 고참 죄수들이 신참 죄수들에게 자행한 고문과 횡포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매번 신참 죄수가 들어올 때마다 이들은 신고식을 빙자하여 신참에게 고문을 자행하며 재물을 토색질하였다. 예를 들어 문에 들어서면 유문례(踰門禮)가 있고, 감방에 들어서면 지면례(知面禮)가 있고, 칼을 벗으면 환골례(幻骨禮)가 있고, 여러 날을 경과하면 면신례(免新禮)가 기다렸다. 또 밥이 들어가면 밥을 빼앗고 옷이 들어가면 옷을 빼앗으며, 깔개에는 깔개값이 있고, 등유와 땔감에는 추렴 명목으로 신참 죄수를 괴롭혔다. 아래에서 당하는 죄수가 이들의 비리를 고발하기라도 하면 고발한 자를 더욱 학대하였다. 

 

1872년 전라도 무주도호부 지도. 지도 중앙 좌측에 원형 담장의 옥(獄)이 있는데, 옥사는 하나만 그려져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자행된 가혹행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정조 때 황해도 해주 감옥에서 발생한 박해득 사망 사건이 증명한다. 사건은 이렇다. 박해득은 황해도 해주감옥에 잡혀온 신참죄수였는데, 해주감옥의 옥졸 최악재란 자는 으레 해오듯이 박해득에게서 돈 50냥을 뜯으려 하였다. 박해득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먼저 감옥에 들어온 고참죄수 이종봉을 시켜 박해득을 손봐주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옥졸 최악재의 사주를 받은 이종봉은 박해득을 잡아 감옥 담 아래에 세워 목에 칼을 채우고는 다시 칼끝을 두 발의 발등 위에 올려놓고 새끼줄로 칼판과 다리를 함께 묶었다. 곱사등 모양을 한 채로 옴짝달싹 못하던 박해득은 결국 썩은 나무가 넘어지듯이 담벼락에 부딪혀 그만 목뼈가 부러져 죽고 말았다. 

비명횡사한 박해득에게 조선의 감옥은 청말의 『활지옥』이 그려내는 ‘이승의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세종 때 감옥이 정비되었지만...

사실 조선왕조 건국 이후 감옥제도는 세종 때에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다. 고려는 지방관이 파견된 큰 고을에만 감옥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일부 작은 고을에서는 감옥 시설이 미비하였는데, 이에 세종은 전국 모든 고을에 감옥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표준적인 감옥 설계도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세종은 남녀가 수감될 옥을 별도로 짓는 것은 물론이고 겨울용 옥사와 여름용 옥사를 따로 두어 병들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각 지방에 옥중 위생관리 규칙을 하달하여 죄수들의 수감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처우 개선에 노력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최근 이은석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이 조선시대 경주와 포항 감옥의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옥의 구조를 복원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들 지방 감옥은 원형의 담장 안 동쪽에 남자 죄수를 수감한 옥사, 서쪽에 여자 죄수용 옥사가 각각 배치되었다고 한다. 감옥을 둘러싼 둥그런 형태의 담장에는 기와를 올렸는데, 높이는 3미터에 달했다. 또 담 바깥쪽에는 다른 건물이 붙어 있었는데, 이 외부 건물은 바로 죄수들을 관리하는 옥리 집무실이었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세종대에 대대적인 신축, 수리가 이루어진 각 군현 감옥의 전형적인 모습은 대략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해미읍성 안에 복원한 감옥 모습

그런데 한 가지 놓치면 안 되는 사실 하나. 여러 기록을 종합할 때 전국의 감옥 시설이 세종의 의지대로 완벽하게 정비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예컨대 1437년(세종 19) 황해도 문화현에서 남편을 살해한 막장이라는 여인이 옥내에서 옥졸 및 죄수들과 간음하여 임신한 일이 있었으며, 1519년(중종 13) 의금부와 전옥서에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수용하여 옥내에서 여죄수가 아기를 낳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죄수가 과밀해지고 시설이 부족한 가운데 남녀 죄수들의 옥내 분리 수용이 완벽하게 지켜지지 못했던 사례가 아닐까 싶다.

더욱이 겨울철에는 추위와 전염병으로 옥사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옥사가 허물어져 수감된 죄수들이 겨울 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하였으며, 제대로 된 옷가지를 걸치지 못한 죄수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앞서 언급한 중종 13년에는 겨우 동짓달 찬바람에 30여 명의 전옥서의 죄수가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죄수들이 옥에서 죽어 나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곤 했다.


한말까지 이어진 감옥의 열악한 실상

프랑스 선교사 리델(1830-1884)

당시 감옥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좀 더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천주교 선교활동을 위해 조선에 왔다가 1878년 좌포도청에서 몇 달간 수감생활을 했던 선교사 리델은 회고록을 남겼는데, 그 한국어판이 2008년에 나온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이다. 책에서 그는 한말의 열악한 좌포도청 옥내 상황을 고발하는데, 그에 따르면 옥사 내부는 환기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좁아서 몸을 가눌 수도 없었고, 헐벗은 상태에서 더위와 추위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당에 샤워 시설은 언감생심이었다. 감옥 중앙의 웅덩이에 물이 있지만 그것으로 몸을 닦았다간 피부병을 얻기 쉬었다. 두 개의 나무판자를 놓은 것이 전부인 화장실은 악취가 진동하였다고 한다. 그는 한마디로 포도청 감옥을 지상에 존재하는 지옥 형상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곳이라고 적었다.

 

     포도청에 수감된 죄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모습.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그렇다면 근대화 과정 속에서 감옥 제도는 어떤 변화를 겪었고, 죄수들의 처우는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최근 원재연 박사는 대한제국기 전북지역 감옥의 상황을 분석한 글을 발표한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1890년대 당시 지방 각 관아에 딸린 감옥 시설들은 여전히 재정 부족으로 노후화된 채 방치된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죄수가 병사하거나 탈옥하는 일도 빈번했으며, 감옥에서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수감자가 자살하는 사건도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열악한 감옥 환경의 근본적인 개선은 여전히 난망한 일이었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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