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인종, 민족 같은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모호한 복합체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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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인종, 민족 같은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모호한 복합체로 존재한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4.23 1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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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 국민, 계급: 모호한 정체성들 | 에티엔 발리바르·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 김상운 옮김 | 두번째테제 | 404쪽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을 시도하고 급진 정치철학 이론을 정력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와 세계체제론의 창시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몇 년간의 세미나를 통해 세 가지 키워드 ‘인종, 국민, 계급’의 역사적 개념과 아포리아를 각자의 이론적 견지에서 풀어낸 저작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쇄신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국민, 인민, 에스니시티, 현대 국가의 문제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2018년 이 책 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에티엔 발리바르와 나눈 대담에서 월러스틴은 이 책을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토론을 위한 더 유용한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썼다고 말한다. 그에 걸맞게 본문에서 양 저자들은 주거니받거니 하며 어느 한 개념으로만 현실을 분석하게 되면 맞닥뜨리게 되는 모순들을 역사적으로 이론적으로 다양한 관점으로 톺아본다.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인종에서 시작하여 국민을 탐구하고, 계급 개념을 살핀 후 사회 갈등의 다양한 양상들을 살피면서 마무리된다. 여기에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의 시각이 녹아들어 가고, 발리바르가 말하는 ‘국민 형태’를 비롯한 새로운 개념들이 정교하게 소개된다. 

책의 대표적 논의를 몇 가지 소개하자면, 10장에서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계급투쟁 개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계급 개념이 가진 양의적 특질과 실제와 이론과의 거리, 프롤레타리아화의 실제 모습 등을 논의한다. 여기서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누락을 발견하는데, 이를 국가에서 실제 일어나는 프롤레타리아화의 다양한 요소들을 제시하면서 보충한다. 그러면서 근대 국가에서 시민이 만들어지면서 개입하게 되는 국가의 역할과 계급 이외의 다양한 기제들에 대한 논의를 제공하고, 적대와 계급투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런 논의를 통하여 독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의 첫 발짝을 떼게 된다. 

더불어 5장에서 국민 형태에 관해 논의하면서, 발리바르는 역사적으로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해 인민을 산출하고 민족을 만들어 내게 되는 과정들과 그 결과 이념으로서의 국민이 만들어지게 되는 과정을 여러 이론적 자원과 연구를 통해 치밀하게 보여준다.

4장에서 월러스틴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펼쳐진 네 개의 민족 구분과 이른바 ‘컬러드’라는 명칭과 관련한 논의를 예로 들며 다민족, 다인종 국가에서 국민으로 묶어 내는 지난한 과정과 갈등을 보여준다. 더불어 식민 시대 이후 아프리카에서 한 나라로 묶였지만 상이한 정체성을 가진 여러 에스니시티의 차이와 이들을 국민으로 묶는 문제가 지닌 복잡함과 모호함을 잘 보여준다. 

9장 부르주아지의 형성에 관한 논의에서는 부르주아지의 개념과 실재 모습의 괴리가 다양한 아바타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인다. 아프리카 등지에서 나타나는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중간간부들의 모습이나 부르주아지의 모델인 상인에서 한참 벗어난 듯 보이는 현대 CEO의 모습 등을 통해 역사적 체제인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부르주아 개념을 재고할 것을 독자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어떤 점에서는 이미 국내에서도 논의되고 파악되어 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들의 모습과 상이한 국가의 구조들이 각자 세 가지 키워드 ‘인종, 국민, 계급’을 계속해서 새롭게 개념화하기를 요청한다. 더불어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하기 위한 논의의 시작점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또한 이 책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극들 간의 끝없는 갈등과 분쟁이 벌어지는 세계의 상황에서, 변화해 가는 자본주의 세계를 사유하는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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