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전환의 디딤돌,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 미학의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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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전환의 디딤돌,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 미학의 새로운 시작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4.1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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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의 새로운 시작: 문명 전환과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의 감각과 서사 | 심광현·유진화 지음 | 희망읽기 | 202쪽

 

이 책은 디지털-메타버스 시대의 주변부로 밀려난 아날로그적인 그림이 자연생태계-사회생태계-인간생태계의 위기가 중첩되는 오늘의 문명 전환의 인지생태학적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는 듯 [그림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한다. 미술만의 고유성을 탐구하느라 삶을 저버린 현대미술과 삶의 복잡성을 재현하느라 미술의 고유성을 간과해온 전통미술의 환원주의적인 이분법을 넘어서자는 과감한 선언이다. 

이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 책은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그림에 대한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현대미술은 사진과 구별되는 그림만의 고유성을 평면성/추상성이라는 협소한 프레임에서 찾았다, 그러나 책은 이런 전략이 실은 20세기 자본주의적 상품화/사물화의 전략과 짝패를 이루는 [지각의 사물화] 과정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대신 도구-손-눈의 연결을 통해 그리는 행위 자체의 인지생태학적인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요구한다. 동굴벽화에서 현대미술까지 그림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세계-그림의 기호학적이고 지각 생태학적인 특성에 대한 미학적 해명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 몸과 뇌에 잠재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일부만을 역설계하고 있는 오늘의 인공지능 자본주의에 맞서 각자의 다중지능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면서 사회적 뇌를 매개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를 발전시키는 정치사회적인 전략이다.

이 책은 오늘의 이행기에 적합한 미학적-정치사회적 사례를 90년대 감성적 리얼리즘과 80년대 민중미술의 리얼리즘의 사례에서 찾는다. 그리고 양자를 새롭게 결합-발전시킬 방법으로 브레히트-벤야민적인 관점을 차용해 [서사-화] 또는 [그림-이야기]라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분리되어 온 [세계, 그림, 이야기, 민중의 새로운 만남]을 촉진할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 미학]을 오늘의 문명 전환의 새로운 주체 형성의 디딤돌로 삼자는 것이다.

80년대 민중미술은 전시장 바깥의 가두시위나 민중적 삶의 현장과 결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미술 제도가 강제로 분리시킨 그림과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기도 했다. 양자를 탁월한 유머와 해학으로 결합한 작가들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민중미술의 넓이와 깊이를 헤아리는 디딤돌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작가가 그 특징을 잘 구현했는지를 따지는 미술사적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오늘의 문명 전환의 분기점이 환기시키는 ‘그림-이야기의 역사지리-인지생태학적 가치’. 손으로 그리고 만드는 행위에 내재한 역동적인 감성적 활력, 현대미술의 권위와 시대의 모순에 맞서는 비판적 지성, 이를 자유로운 언어의 유희로 연결하는 다중지능 네트워크 역량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림(과 이야기의 결합)의 새로운 시작’은 무엇일까? ‘그림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시동을 걸고 민중미술 작가들이 수십 년간 암묵적으로 실천했지만 그 의미가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한, ‘감성적 리얼리즘’과 ‘넓은 세상’ 이야기를 그린 ‘민중적 리얼리즘’을 명시적으로 새롭게 결합하자는 선언이다. 이는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그림으로 펼침으로써 개인의 개체발생적인 다중지능 네트워크를 사회적인 계통발생의 네트워크와 선순환시키는 혁명적 전환을 뜻한다.

사회 체계가 안정된 시기의 예술은, 지배적인 생산관계의 재생산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겪게 되는 다양한 갈등과 고통을 카타르시스로 순화함으로써 제도적 지위를 부여받는다. 창작의 내용과 표현이 원자화된 개인들의 단성적인 독백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오늘과 같은 문명사적 ‘이행기의 예술’은, 시스템이 요동쳐 발생하는 공백 속에서 자유로워진 개인들을 사회적 개인들로 연결한다. 흩어진 개인들을 역동적인 링크로 연결하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 이로써 창작의 내용과 표현은 대화적, 다성적, 민중적인 성격을 취하게 된다.

오래 전 동굴벽화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민중, 그림, 이야기, 세상은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했다. 이 책은 거대한 문명 전환의 시기를 맞아 이 네 가지의 새로운 만남을 촉진해 보자고 제안한다. 한때 첫발을 내딛었다가 한동안 소강상태에 머물렀던 서사-화, 그림-이야기, 이야기-그림, 세계-그림의 새로운 시작이 그것이다.

책의 1부에서는 문명 전환을 위한 복잡한 과제를 그림-이야기의 새로운 시작이 어떻게 풀 수 있는지를 기호학적이고 인지생태학적 관점에서 해명한다. 그리고 안정기의 사유/예술과 이행기의 사유/예술이라는 문제틀을 제시하면서 후자의 이론적 근거를 바흐친과 더불어 70~80년대 김윤수의 리얼리즘 미학과 민중미술운동에서 새롭게 발굴한다. 이런 점에서 책의 1부는 미술이론 또는 미술철학에 해당한다. 반면 책의 2부는 이런 관점을 오늘의 시점에서 구현한 26명 작가들의 46점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회 〈그림의 새로운 시작〉의 기획 및 각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꾼-작가 유진화의 해설과 전시 기획자이자 평론가인 심광현의 평론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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